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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Jun 01. 2023

일상에서의 자기검열 (정치)에 대하여

이 남자가 사는 법 그리고...

이미지 출처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3011818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사용자 참여의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백과(위키피디아 자체 정의)에 의하면 <자기검열(自己檢閱, self-censorship)>을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 또는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할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정치(政治, poliitcs)>을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라고 정의한다.

종합하여 오늘 주제인 자기검열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하고
타인의 감정도 상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가 소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행위





서글프게도 나의 자기검열의 정치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시작된다.


아내는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팔다리가 시도 때도 없이 저린다. 장인어른도 수시로 가족에게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 같다.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아내는 결혼 초기부터 남편인 내게 요구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리를 5분 간 주물러달라는 부탁이었다. 20대 중반 혈기왕성한 나이에 결혼한 나는, 일어나지 마자 아내의 원활한 혈액순환을 위해 다리를 주물러주는 것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십 줄의 나이가 되니 눈 뜨자마자 손가락에 힘을 주어 아내의 다리를 주무르는 것이 여간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었다. 눈 뜨기 힘든 날에는 아내가 깊은 잠에 든 걸 확인한 후 몰래 그냥 일어나거나 대충 흉내만 내면 아내는 여지없이,


"그래 남자들은 다 똑같지 뭐! 신혼 때는 별도 달도 다 따줄 것처럼 하더니 이제는 그깟 다리 하나 주물러주지 않네."라고 푸념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눈 비벼가며 자기검열의 정치로 아내의 다리를 주무른다.





두 번째 자기검열의 정치는 출근하기 위해 갖춰 입는 옷이다.


스스로 말하기 (많이) 쑥스럽지만 얼굴이 동안이다 동안이라고 한다. 올해 일흔여섯 되는 아버지를 사람들은 예순다섯 같다고 말을 한다. 아들인 내가 봐도 아버지는 친구분들 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신다. 동안 남편을 둔 우리 어머니는 이게 늘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옷차림도 항상 젊게 하고 다니려고 신경 쓰신다. 문제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 나도 아버지를 닮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내도 어머니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작년부터 학교 교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교감하면 머리도 희긋희긋하고 얼굴에 뭔가 삶의 연륜이 드러나야 하는데 나는 한 올의 흰머리도 없다. 풍기는 외모는 교감이 아닌 교사처럼 보인다. 복도에서 학생들이 나를 보면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과목을 가르치세요?"라고 묻곤 한다.

청바지에 편한 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어쩔 수 없이 빳빳이 다림질한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반질반질한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한다. 학생들 현장체험학습 인솔할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청바지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세 번째 자기검열의 정치는 모든 남자들이 공감할 듯한 헤어숍에 다녀온 아내에 대한 리엑션이다.


하루종일 아내의 기분이 좋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인 내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없는 것 같다. 많은 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일단 '미안하다'라고 한다. 아내는 그럼 뭐가 미안하냐고 돼묻는다. 그럼 나는 다시 고민을 한다. 하는 척을 한다. 아내는 기다리다 지쳐 그때서야 "나 뭐 바뀐 거 없어?"라고 묻는다. 나는 아차 싶다. 이럴 땐 십중팔구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이다. "아~~ 예쁘네. 헤어스타일이 예쁘게 변했네!"라고. 그럼 아내는 또 묻는다. "어디가 어떻게 바뀌었는데?"라고. 이쯤 되면 안팎 구별이 없는 무한반복의 뫼비우스의 띠다.

지금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답변을 아주 잘해야 한다. 하지만 결혼 25년이 지났어도 이 질문에 답을 잘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내가 머뭇거리면 아내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러면 그렇지 이제는 결혼한 지가 오래돼서 나에게 관심이 없지. 부부가 그렇지 뭐."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한다.

이럴 때 나는 솔직히 긴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는 이상 조금 바뀐 아내의 머리모양을 바로 알아차리는 남편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늘도 나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머리모양이 조금이라도 바뀐 것 같으면 미리 말을 한다.

"와우~ 오늘 헤어스타일이 예쁜데"라고. 그럼 아내는 "어제랑 똑같은 머리인데..."라고 한다.







네 번째 자기검열의 정치는 우습게도 우리 집 냥이님이다.


동물한테까지 자기검열의 정치를 해야 하는가 싶지만, 우리 집 고양이는 이미 동물의 범위를 넘어 인간의 반열에 오른 존재이다. 아마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라면 공감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우리 집 냥이님의 특별한 아침식사를 챙겨주는 것이다. 우리 집 고양이는 아침식사를 제외하곤 온종일 딱딱한 사료만 먹는다. 입양된 지 1년 후부터 고양이의 건강을 위해 영양이 풍부한 연어와 닭가슴으로 만든 습식사료를 챙겨준다. 어느 날 깜빡하고 아침 특식을 제공하지 않은 날은 냥이님의 성깔이 매우 난폭해진다. 이럴 땐 가차 없이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가구에 마구 스크레치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심심하니 놀아달라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종아리를 할퀴어도,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옆에 앉아 시건방지게 노려보고 있어도 냥이님 성품이 사나워질까 봐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예쁘다고 털을 쓰담쓰담 만져준다.

어쩔 땐 누가 사람이고 누가 애완동물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고양이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실감한다.







마지막 자기검열의 정치는 이곳 브런치에서의 글쓰기이다.

자기검열의 정치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글을 쓴 진짜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브런치에 69편의 부족한 글을 발행했다. 행복했다.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쓰는 글이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 자기검열의 정치를 하지 않는 글을 온전히 쓴다는 것이 뭔가 내게 부여되는 색다른 정신적 자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의 지인이 브런치의 글을 읽고 나를 유추하기 시작하였다. 새삼 브런치의 대중성을 실감하면서 학교 선생님들이 브런치에 글을 많이 쓰고, 글을 관심 있게 읽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다. 어떤 이는 프로필 사진을 보고 나를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5년 전 에스토니아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알아볼 줄이야. 물론 모두 시치미를 뗐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혹시 책을 출간한다면 그때는 나를 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브런치가 제공하는 익명성 뒤에 숨어 생각만 하고 쓰지 못했던 글을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글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자기검열'에 빠지게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자기검열의 정치에는 원래 학교 이야기도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자기검열에 빠져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더 내밀한 나의 가족이야기도 이미 써 놓았는데 발행을 하지 않고 있다.

요즘 뜨는 브런치북 코너에는 마치 자기검열을 하지 않은 듯한 주제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나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자기검열은 창작의 자유와 열정을 빼앗는 것이 분명하니까.

 

내 삶이 뭐가 특별하다고 이제 갓 브런치에 입문한 신입생이 자기검열을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우습긴 하다. 더 내려놔야 할 것 같다. 진정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실천해야 함을 느낀다.


한 가지 더,

관심작가 분들이 정성껏 쓴 글들을 별도의 시간을 내어 모두 읽으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이렇게 글솜씨가 좋은 제야의 고수들이 많을 줄이야. 20년 간 교실에서 글쓰기 수업을 한 나는 '우물 안 개구리'이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내 글이 참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러하다 보니 또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이런 유치한 주제와 내용으로 브런치에 글을 발행해도 될까?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쓸 때의 자신감과 당돌함(?)이 많이 사라졌다.


이런 나만의 고민들이 상당한 내공이 있는 브런치 작가님들도 한 번쯤 겪었던 슬럼프(?)이길 바란다.





덧붙이는 말 :

이번 글의 제목은 뭔가 사회정치학적  포스가 물씬 풍기는 '자기검열의 정치'입니다. 하지만 사회정치학적인 글이 아니라 가벼운 에세이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하루는 얼마나 많은 자기검열로 이루어졌나에 대해 글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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