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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 교장 Mar 09. 2024

초록뚜껑 빨간띠 야쿠르트


나는 초록뚜껑에 빨간띠를 두른 야쿠르트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80년대 초,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아버지는 중동에 나가 오일머니를 버는 해외노동자였다.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아버지는 2년에 한 번 정도 집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영어를 모르는 어머니는 국민학생인 내게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에 영어로 주소를 써달라고 했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말도 통하지 않은 뜨거운 나라에서 고생해서 번 돈을 쓰기 아깝다며 모두 저축을 하였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화장품 외판원을 하셨다. 코흘리개였던 나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시는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버스 비용도 아까워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셨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남동생이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형제가 안쓰러워 밥상에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놓고 밥상보로 덮어 놓고 일을 나가셨다. 밥상보를 들어 올리면 반찬 옆에는 언제나 야쿠르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동생과 나는 밥을 먹기 전에 야쿠르트를 먼저 마셔 버렸다. 이때 마신 시큼 달콤한 야구르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양은 왜 이렇게 적은 지. .  아쉬워하면서 마신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장차 커서 어른 손바닥만한 요구르트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전부터 편의점에 어릴 적 그렇게 바라던 대왕 야쿠르트를 팔기 시작했다. 큰 야쿠르트를 팔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보다.)



어제 점심때 칠십이 훌쩍 넘은 어머니를 만났다.

이모님 그러니까 어머니 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요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면회를 가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혼자 이곳에 오신 것이다. 동생과 나는 시간을 내어 학교 근처 한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어머니는 당신이 차린 밥상이 아님에도 사십 대 후반과 오십 대의 두 아들에게 연신 먹을 게 없어서 어떡하냐고 안절부절이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다. 당신 앞에 있는 반찬들을 두 아들 앞으로 나르기 바쁘시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우리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돈 벌리 나간다고 한 참 잘 먹을 나이에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주름진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고생해서 키워주셔서 오십의 젊은 나이에 큰 학교의 교장도 하고 있지 않냐고 말을 했다.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을 시절, 어머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산다는 것은 시간이 주는 수많은 장면들을 가슴에 담고 그 추억을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함께 웃고 우는 것이 아닐까...


짧은 식사를 하고 동생과 함께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어릴 적 밥상 위에 야쿠르트 두 개를 내려 놓는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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