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록뚜껑에 빨간띠를 두른 야쿠르트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80년대 초,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아버지는 중동에 나가 오일머니를 버는 해외노동자였다.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아버지는 2년에 한 번 정도 집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영어를 모르는 어머니는 국민학생인 내게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에 영어로 주소를 써달라고 했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말도 통하지 않은 뜨거운 나라에서 고생해서 번 돈을 쓰기 아깝다며 모두 저축을 하였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화장품 외판원을 하셨다. 코흘리개였던 나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시는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버스 비용도 아까워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셨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남동생이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형제가 안쓰러워 밥상에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놓고 밥상보로 덮어 놓고 일을 나가셨다. 밥상보를 들어 올리면 반찬 옆에는 언제나 야쿠르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동생과 나는 밥을 먹기 전에 야쿠르트를 먼저 마셔 버렸다. 이때 마신 시큼 달콤한 야구르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양은 왜 이렇게 적은 지. . 아쉬워하면서 마신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장차 커서 어른 손바닥만한 요구르트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전부터 편의점에 어릴 적 그렇게 바라던 대왕 야쿠르트를 팔기 시작했다. 큰 야쿠르트를 팔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보다.)
어제 점심때 칠십이 훌쩍 넘은 어머니를 만났다.
이모님 그러니까 어머니 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요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면회를 가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혼자 이곳에 오신 것이다. 동생과 나는 시간을 내어 학교 근처 한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어머니는 당신이 차린 밥상이 아님에도 사십 대 후반과 오십 대의 두 아들에게 연신 먹을 게 없어서 어떡하냐고 안절부절이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다. 당신 앞에 있는 반찬들을 두 아들 앞으로 나르기 바쁘시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우리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돈 벌리 나간다고 한 참 잘 먹을 나이에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주름진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고생해서 키워주셔서 오십의 젊은 나이에 큰 학교의 교장도 하고 있지 않냐고 말을 했다.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을 시절, 어머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산다는 것은 시간이 주는 수많은 장면들을 가슴에 담고 그 추억을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함께 웃고 우는 것이 아닐까...
짧은 식사를 하고 동생과 함께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어릴 적 밥상 위에 야쿠르트 두 개를 내려 놓는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