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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 교장 Mar 11. 2024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1.


교사 시절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쳤다.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은 없다. 더구나 학생의 입장에서는 전 과목이 어렵다. 나는 수업 시간에 이데올로기, 동서양과 한국의 사상 등을 가르쳤다. 사고(思考) 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칸트와 헤겔, 정약용을 이해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항상 첫 수업 시간에는 칠판에 이상하게 생긴 4명의 사람을 그렸다.


첫 수업 때 칠판에 그린 그림


"얘들아 선생님이 피카소 빰 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해볼래?"

나는 아무 설명도 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눈 사람 같아요.", "사람이 모두 이상해요.", "가분수도 있고 머리가 작은 사람도 있고..."

학생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을 했다.


"우리가 윤리 과목을 배우는 이유와 관련되어 있어. 오늘부터 배울 윤리 과목은 장차 너희들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좋을지와 관련되어 있지. 네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인지 맞춰볼래? "

나의 첫 수업은 이렇게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왜 우리가 윤리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진행된다.


외계인 같은 그림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①번은 머리는 작은데 가슴(마음)이 넓은 사람,  ②번은 머리는 큰 데 가슴이 좁은 사람, ③번은 머리와 가슴 둘 다 좁은 사람, ④번은 머리도 가슴도 크고 넓은 사람을 의미한다.

머리는 이성(理性)적 사고력, 판단력과 이해력, 지능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학생들에게는 알아듣기 쉽게 머리가 큰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고 머리가 작은 사람은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가슴은 성품의 선함과 악함, 마음이 따뜻함, 배려와 공감, 타인을 돕는 마음과 관련 있다고 말하면서 학생들에게는 가슴이 큰(넓은) 사람은 성품이 선하여 타인을 돕는 착한 사람으로, 가슴이 작은(좁은)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칫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마음도 따뜻한 사람인 ④번이지만, 윤리 수업의 목표는 ①번이라고 말한다. 비록 공부를 못 하고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나쁜 사람은 ③번이 아니라 ②번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도 덧붙인다. 똑똑하지 못하면서 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도 문제지만 더 큰 골칫덩이는 아는 것이 많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 나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명석한 두뇌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2.


어제 딸과 영화 '듄 : 파트2'를 봤다.

듄의 세계관, 주인공에 얽힌 서사를 전혀 모르고 봤던 터라 스터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막에서 펼쳐지는 웅장한 전투신은 재미있었다. 사람마다 영화를 본 후 기억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폴(티모시 샬라메)이 새롭게 황제가 되면서 사랑하는 챠니(젠데이아 콜먼)가 아닌 이룰란 공주와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장면이다. 화면은 폴이 챠니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한 상황에서 계속 챠니의 괴로운 표정을 크게 보여준다.

챠니의 표정은 새롭게 황제가 될 연인 폴이 군인인 자신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폴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상황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복잡하고 괴로운 상황을 알려준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은 얼마나 괴로울까?


#-3.


나는 교장이 되기 전 아내를 많이 힘들게 했다.

교사 시절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서는 궂은일을 자청해서 했고, 학교 밖에서는 전문성 신장을 위해 여기저기 연수와 공부를 하러 돌아다녔다. 급기야는 석사뿐만 아니라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내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자 아내는 꾹 참다가 가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공부하고 일을 해야 해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이른 나이에 교장이 된 나는 젊은 시절 소홀히 했던 남편과 아빠 노릇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최우선의 가치를 가족에 두고 있다.


#-4.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모든 책을 사서 읽고 또 읽는다. 특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삶이 힘겨울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어 읽는 책이다. 오랜 시간 감옥에 있으면서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고 그런 고귀한 글을 쓸 수 있는지, 정말 많은 깨우침을 주는 책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슴, 즉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이 마음은 악한 의도가 아닌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까지 가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다. 또한 가슴까지 가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해서 하는 행동은 악한 동기가 숨어 있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칸트는 선의지(善意志)에서 비롯된 행동만이 진실로 선하다고 말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 가장 먼 여행이라고 말한 의도는 우리 인간이 선한 의지를 갖고 머리로 생각한 바를 가슴으로까지 이어져 그것이 비로소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비록 머리는 작더라도 가슴이 넓은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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