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는 우리 가족과 10년을 함께한 특별한 야자수가 있다.
제주도 외딴길에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는 돌하르방의 우직함처럼 베란다 구석에서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 있는 야자수이다. 뿌리를 보면 할아버지의 흰 수염처럼 얇은 줄기들이 훤히 보여 오랜 시간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만들어 가져온 이후 언제나 그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애정을 갖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았는데도 오랜 시간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한 걸 보니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 햇빛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있어 물만 잘 주면 별일 없이 잘 산다. 그렇다고 내가 주기적으로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야자수 있는 베란다에 갈 때 아주 가끔 물을 줄 뿐이다. 두 달에 한 번 물을 줄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꿋꿋이 버티며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까지 한다.
어제는 베란다에 나갔다가 우연히 힘들어하는 야자수를 발견했다. 미안했다. 뿌리를 보니 말라 비뚤어져 오랜 가뭄에 담쟁이넝쿨이 벽에 힘없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병에 딱 붙어있었다.
주전자에 물을 받아 PT병에 물을 채우는데, 불현듯4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형이 떠올랐다.
형은 이별의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생명의 끈을 놓아 버렸다.
'하물며' 어린 딸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든 야자수 화분도 10년 동안이나 그 질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렇게' 건강하던 50대 초반의 나의 형은 왜 세상을 떠나야만 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누구는 처음부터 더 큰 종합병원에 갔어야 했다고도 말하고, 누구는 이렇게 일찍 이곳을 떠난 것이 팔자 혹은 운명이라고도 말한다. 삐쩍 말라버린 그렇지만 여전히 건재한 야자수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작은 식물은 도대체 어떤 생명의 끈을 갖고 있길래 이리도 질기게 살아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야자수 화분은 일반 화분이 아니라 PT병을 반으로 잘라 만든 화분이다. 일반 화분에 물을 주면 식물의 뿌리가 물을 마시기가 무섭게 밑으로 다 빠져 버린다. 그런데 PT병 화분은 물을 온전히 담고 있어 언제든 뿌리가 물을 먹을 수 있는 구조이다. 물론 다른 식물의 뿌리는 오래 담겨 있으면 썩지만 야자수 뿌리는 썩지 않은 특성도 한몫한다.
우리도 좋은 것은 금방 다 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오랫동안 머물며 천천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10년째 가느다란 줄기를 뽐내고 있는 야자수는 햇볕과 물이면 충분하다. 많은 공간도 필요 없다. 온도와 습도도 상관없다. 가끔 물만 주면 된다. 다른 건 필요 없다.
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요구한다. 과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먹고, 지나칠 정도로 치장을 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많아야 하고, 끊임없이 관심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것을 채워야 하니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너무나 힘들다.
많은 사람의 관심도 필요 없다. 지금처럼 잊지 않고 단 한 사람의 관심만 있어도 살아있음을 유지한다. 이 단 한 사람마저도 오랜 시간 관심 갖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야자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힘들 때 그래서 때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때는 단 한 사람의 관심조차도 받지 못했을 때이다. 누군가 그 사람에게 따뜻한 물 한 잔 건네주었다면 그런 극한의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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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그냥 그렇게 너에게 내어준 베란다 창가 한 구석 자리만으로 만족하며 살아줘서. 내가 정말 힘든 상황에 처해서 자칫 너를 찾지 않을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를 믿고 기다려줘서"
나는 물을 주면서 야자수에게 속삭인다.
"괜찮아. 잊지 않고 가끔 물만 주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러니 너만 잘 살면 돼"
야자수는 내게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