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의 '검은 뱀'을 읽고
검은 뱀이
아침 도로에 갑자기 달려 나왔고
트럭은 그를 피할 수 없었다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메리 올리버(Mary Jane Oliver)의 詩 '검은 뱀'을 읽으니 내 곁을 떠난 가족이 생각난다.
어릴 적 난
죽음은 주말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오는 줄만 알았다. 곧 세상을 떠날 할아버지(또는 할머니)는 병원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있고, 가족들은 주변에 모여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편히 쉬세요.'라고 한 마디씩 하며 눈물을 훔치는 극적인 장면.
그런데 이런 죽음은 고등학교 2학년을 기점으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조카들 중에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셨던 둘째 큰아버지는 새벽에 홀로 바다에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함께 밥을 먹고 얘기 나눴던 가족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 평생 볼 수 없다는 현실은 당연히 믿어야만 하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에게 첫 번째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장학사 시험 합격한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섯째 작은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들만 여덟을 낳았다. 나는 어릴 때 큰 아버지, 작은 삼촌만 있고 고모가 없어서 불만이 많았다. 할머니를 보면 "왜 나는 고모는 없냐"라고 "빨리 고모를 낳아달라"라고 어린냥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이 눔아, 할매가 꼬추만 낳고 싶어서 낳았냐? 할매도 딸을 낳고 잡았재. 그란디 어쩌겠냐 내 속대로 안 됐는디?"라고 원망의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다섯째 작은 아버지는 형제 중 가장 공부를 잘했다. 수산협 협동조합(수협)의 정직원이었고 나중에는 수협의 이사까지 하고 퇴직을 하셨다. 이런 작은 아버지는 조카들 중에 나를 제일 예뻐하셨다. 작은 아버지는 외모뿐만 아니라 공부를 잘한 당신을 닮았다고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나 또한 다른 삼촌들과 달리 유식한 말로 교양 있게 말해주는 그런 작은 아버지가 제일 좋았다.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에게 두 번째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늦은 밤에 처형에게 전화가 왔다. 벨소리는 뭉크의 절규 속 사람이 내는 비명소리 같았다.
"오빠가 병원에 입원했어. 지금 의식이 없데.. 어떡해?"
숨 넘어가는 목소리는 아내의 귀를 뚫고 내 귀까지 선명하게 전달됐다. 정신 나간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병원에 달려 갔다. 나는 당연히 이때까지만 해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최근 사업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아픈 것이라 여겼고, 며칠 입원하고 나면 금방 퇴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형님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형님을 보러 간 것은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병원 응급실 한 구석에 누워 있는 형님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움직이는 가슴을 보니 숨은 쉬고 있었다. 하지만 발을 만져보니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다.
형님은 185cm, 90kg이 넘는 건강하고 다부진 사람이었다. 아내와 연예시절 몰래 형님댁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거실에 걸려 있는 육군 장교복을 입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목구비가 너무 또렷하고 눈매는 마치 독립투사처럼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형님은 사업가였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무렵 형님은 작은 트럭 한 대를 사서 철강 유통업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성실한 형님은 몇 년 만에 동종업계에서 소문날 정도로 성공한 부자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 형님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특히 형님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효자였다. 장모님(어머님)은 이런 아들이 너무 대견스러웠고,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 아들만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입원한 지 5일째 되는 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형님을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아내는 지금도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나면 무서워하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병원을 옮긴 그날 저녁 아내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의사가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했다며 꺼억꺼억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렇게 형님은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긴 그날 저녁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얼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웃었던 사람이 갑자기 두통이 심해 병원에 입원한 지 7일째 되는 날, 우리를 두고 갑자기 사라졌다. 나에게 세 번째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형님이 내 앞에서 사라진 지 4년이 지났다.
찢어질 듯한 아픔도 조금은 무뎌졌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산 사람은 그렇게 살아지는 것인지 나는 가끔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고 살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어 만지면 죽을 듯 아프다.
아내의 오빠를 나는 형(님)이라 부른다. 피를 나눈 친형보다 더 가까운 우리 형이 내게 준 선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선물이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일까? 거실 한 곳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형은 볼 때마다 내게 다른 말을 건네준다. 어제는 '그렇게 욕심부리지 않아도 돼. 그냥 편히 살아'라고 말하고, 오늘은 '삶은 네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으니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제목 : 검은 뱀
검은 뱀이
아침 도로에 갑자기 달려 나왔고
트럭은 그를 피할 수 없었다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지금 그는 낡은 자전거 타이어처럼
둥그렇게 쓸모없이 널브러져 있다
나는 차를 세우고
그를 숲 덤불 속으로 옮겨준다
그는 꼬아 만든 채찍처럼
차갑게 번들거린다
그는 죽은 오빠처럼 아름답고 고요하다
나는 그를 나뭇잎으로 덮어주고
계속 차를 몰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갑작스러움,
그 가공할 무게감,
그 확실한 도래. 그러나 내심으론
뼈들이 언제나 선호하는
더 환한 불이 타고 있다
그것은 끝없는 행운을 이야기한다
잊으라고 한다
난 예외니까! 하고
그것은 모든 세포의 중심에 있는 빛
그것이 뱀에게 봄철 내내 행복하게 똬리도 틀고
흐르듯 질주하며 푸르른 잎들 사이로 누비게 하더니,
마침내 그는 도로로 나왔던 것이다
- 메리 올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