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 광장이 잠들 때까지, 까바를

셰리, 로제, 브랜디, 까바

by 윤해

음식은 타파스로, 와인은 잔 술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스페인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었다. 세비야에서의 계획은 하루 종일 수영하고 마시는 것이었다. 비록 날씨로 인해 하루 종일 수영하기는 좌절되었지만, 마시기는 좌절할 수 없지. 타파스 문화를 제대로 즐겨보리다. 짧은 수영을 마치고 세비야 거리로 나섰다.




1차로는 세비야에서 유명하다는 고풍스러운 타파스 바에 줄을 섰다. 그라나다에서 이미 배운 교훈, 타파스 바도 줄을 서야 한다. 짧은 웨이팅 끝에 입장하니, 좌식과 입식 테이블이 빼곡했고, 사람들의 말소리로 바가 가득 찼다. 가족 대대로 이어져오는 곳이라는데, 나도 이런 멋진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바에 있던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화이트 셰리를 주문했다. 스페인에서는 부담 없이 잔술을 주문할 수 있어서 별생각 없이 주문하고 받는 대로 마셨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 마실 수 있다는 점이 편안했다. 문어 뽈뽀, 레드 셰리, 샌드위치를 고르고 블러드 소시지라는 메뉴도 도전해 보았다. 론다에서 로제에 빠졌었는데, 세비야에서는 셰리가 그렇게 좋았다. 드라이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샥 지나가는 깔끔함에 빠져서 셰리를 찾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달지 않고 맛있는’ 맛의 셰리였다. 조금 뒤 뜻밖에도 너무나 익숙한 비주얼의 메뉴가 나왔다. 블러디 소시지는 순대였다. 역시나 익숙한 맛에 당황했지만 순대는 역시 맛있지.




세비야 거리를 걸으며 2차로 갈 바를 모색했다. 나는 원래 대문자 J라 여행지의 맛집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다. 하지만 세비야에서는 정하지 않는 것이 계획이었다. 여행객만이 누릴 수 있는 우연한 재미를 만날 수 있도록, 세비야에서는 왠지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벽면 가득 쌓인 와인 병들이 멋진 바에 들렀다. 화이트 와인과 로제 와인을 주문하고 홍합 통조림에 도전해 보았다. 처음 접해봤는데 마음에 쏙 들어서 마트에서 홍합 통조림을 구매했다. 돌아가서도 스페인을 추억할 수 있도록.


호텔 바에서 열리는 재즈 공연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자리가 없을 뻔했는데 마지막 손님으로 들어왔다. 브랜디와 셰리를 주문했다. 따뜻한 물 잔위에 브랜디 잔이 얹어져 나왔다. 달콤한 브랜디 향이 천천히 퍼지고 재즈가 흐르고, 충만한 마음이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생각을 하며 방으로 올라왔다. 되돌아보니 평소보다 많이 마신 건 아닌데 충분히 마셨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분위기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걸까.




방문을 열자, 아이스 버킷 속 까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둥근 유리 돔 아래 각양각색의 초콜릿들도 놓여있었다. 뒤늦은 웰컴 선물이 도착한 것이다. 방금까지 세비야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하는 마음이긴 했지만, 이걸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발코니에서 마실까?”


발코니 너머로 세비야 광장이 내려다보였다. 낮의 활기찼던 모습과는 달리, 아롱아롱한 불빛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시원한 까바를 잔에 따랐다. 기포가 잔 너머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행의 끝 같은 대화를 나눴다. 광장의 조명이 하나둘 꺼지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청소차가 들어오는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분명히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나눴는데,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달콤한 까바와 초콜릿,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만이 그 발코니의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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