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1박에 70만 원.

10대 키우는 엄마가 플렉스 하는 법

by 글린트

가만있어 보자...

올해 우리 가족이 리조트 가서 논 적이 있었나?

없었다.

여태 뭐했지?


작년에는 아이들 생일마다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생일마다 선물만 주는 것이 재미없기도 하고 두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많이 놀아둬야지 하는 요상한 보상심리가 깔려 있기도 했던 것. 아이들도 자기 생일에 여행 다녀온 기억이 좋았는지 요즘도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데 올해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학교에 현장체험학습을 신청하기도, 학원 빠진 후 진도 보충해달라 하기도 뭔가... 쉽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우리만 정신 못 차린 기분이랄까?그래서 굳이 여행 계획을 잡지 않기로 하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월화수목금토 매일 학원이 있고 주말엔 밀린 숙제 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밤늦게까지 학원 숙제를 하고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힘겹게 일어나는 큰아이가 참 안쓰러웠다. 에고에고 우리 딸 고생이 많네.


엄마인 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내가 해주는 건 아침밥, 간식, 저녁밥뿐인데... 그것도 가끔 배달이고... 미안. 엄마는 친구들 만나서 수다도 떨고 쇼핑도 하는데... 미안. 걷기 운동하러 나가면 엄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사는데... 미안. 우리 딸은 학교 학원 집만 쳇바퀴 돌듯 다니는구나.


마음이 아렸다.





그래서 검색했다. 서프라이즈 1박 2일 여행을! 남편에게만 살짝 귀띔하고 아이들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어디로 갈지 얼마짜리 호텔을 예약할지 모두 내가 정하기로 했다. 역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은 준비하는 자가 더 기쁜 것 같다며 즐겁게 검색에 들어갔다.


그런데 호텔과 리조트를 검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커다란 고민이 생겨버렸다.

그것은 주중과 주말의 가격차이.

2배의 차이가 났다.

주중에 30만 원짜리는 주말에 60만 원. 주중에 40만 원짜리는 주말에 80만 원.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주중에 묵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의 학교와 학원이 마음에 걸렸다.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 적응하고 있는 수학 학원, 레벨이 높은 반으로 옮겨서 열심히 따라가야 하는 영어학원... 호텔의 하룻밤 가격 차이를 보면 당연히 주중으로 결제해야 하지만 또 엄마 마음이라는 게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의 페이스를 깨기가 싫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점찍어 뒀던 호텔의 예약이 차 버리고 나는 더욱 고민과 초조함에 빠져버렸다. 아니 호텔 고르기가 이렇게 힘들었나. 어서 결정해야 하는데 어쩌지.




그때 시간 쓰기의 효율성을 설파하던 어떤 유튜버가 부자들이 퍼스트 클래스를 타는 이유에 대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부자들은
허세로 퍼스트 클래스에 타는 것이 아니고,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다.)
사업상 중요한 자리에 갈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도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퍼스트클래스나 이코노미석이나 비행기에 타는 시간은 똑같지만 그 가격은 몇 배의 차이가 난다. 그게 바로 각각의 사람이 자기 시간에 매기는 가격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시간은 얼마로 매길 수 있을까. 내가 찜콩한 호텔은 주중 35 주말 70의 가격이었다. 아이들이 자기 루틴대로 공부하는 시간의 가치와 35만 원.중 어느 쪽의 가치가 더 높을까. 아이가 둘이니 한 아이당 17만 5천 원이네. 그러자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이 정도 보상은 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했다. 땅땅땅!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당당하게 토요일 체크인으로 예약을 해버린 것이었다. 폰 화면에서 70만 원 결제하기를 누를 때는 손 끝에 땀이 좀 났던 것도 같다. 예약하고서 예약이 확정됐다는 문자가 오고 나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70만 원짜리 호텔 1박을 하게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 잘한 것 맞지? 라는 약간의 자기 검열과 그 돈이면 명품 지갑 하나 사는데 하는 색다른 아이디어가 그제야 생각났지만... 이미 다 지났다. 하... 하하...

이제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고 기뻐하는 표정을 볼 일만 남았구나. 엄청 좋아하겠지. 잘했어 나 자신.




예약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저녁, 드디어 아이들에게 우리의 여행 계획을 알려줬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너무 기뻐했다.

"우리 얼마 만에 놀러 가는 거야?"

"oo호텔? 거기 내 친구가 가봤는데 엄청 좋댔어!"

아직 부모와 놀기를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 뿌듯했다. 역시 예약하길 잘했어.


"그럼 언제 가는 거야?" 딸이 물어봤다.

"o월 o일."

달력이 있는 벽으로 달려가 날짜를 보는데

이상하게도 달력을 보는 아이의 뒤통수가 약간 싸했다.


"토요일?" 딸이 물었다.

"응. 토요일에 예약했어. 딸 학원 1시에 마치고 출발하면 돼. 주중보다 배로 비싼데 엄마가 학원 시간 피하려고 토요일로 예약했어. 하하하"


어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면서 그 의미가 해석된다.

그렇다.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대단한 뻘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목적지에 대한 기대와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쉼'에 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밥 해 먹다가, 그 모든 것에서 잠시 헤어 나와 쉬는 것. 그게 여행을 하는 진정한 이유 아닐까.


그런데 나는 배로 비싼 돈을 굳이 줘가면서 아이의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동안 공부 열심히 한 보상을 준다면서...




딸아이는 아마 그전부터 늘 주중에 여행 갔던 것을 생각하고 뛸 듯이 기뻐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토요일 학원까지 다 마치고 가는 반쪽짜리 쉼이라는 것을 알고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엄마의 센스 없음을 들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잘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손해로 돌아온 기분이다.


그래, 나 실수했다. 더 좋은 결정은 내리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이번 선택을 잘 설명해줄 것이고, 그게 우리 아이들에게 자기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건 그렇고 아... 내 35만 원... 살면서 가장 아까운 35만 원이 되어버렸네.


35만 원이면 아이 패딩 한 벌 살 수 있는데...

예쁜 코트도 살 수 있고...

오마카세 하는 식당 갈 수도 있고


...

...


그랬어.

다음엔 힘을 조금 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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