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거리다 눈을 살짝 떴다. 재우가
여어, 민준. 했다.
으음...? 재우?
하! 야 이민준. 너 기억 못 하나 보다?
......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 있는 알코올 섞인 피가 머리와 위장으로 한 번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워서 간신히 손을 짚고 일어나서 앉았다. 빙빙 도는 느낌이 갑자기 더 심해졌다.
우욱!
속에서 큼지막한 것이 게워져 나오려 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야야! 저쪽으로, 저쪽, 저쪽!
재우가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재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왁 하면서 위장에 있던 것들이 게워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젯밤의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하아... 하아...
이제 끝난 것 같았지만 더 게워내고 싶었다. 어제의 것이라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우고 싶었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었다.
억, 억
샛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속을 비워냈다.
민준아, 괜찮아? 재우가 와서 등을 두드렸다.
변기 물을 내리고 손을 씻었다. 세면대를 잡고서 거울을 봤다.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붓고 허여멀겋게 된 병자의 얼굴이 비쳤다. 거울에 비친 추한 얼굴. 무표정이었던 내 얼굴은 천천히 이지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우는 것으로 마음이 새어 나오게 두고 싶지 않았다. 바보처럼 굴기 싫었다. 울면... 지금 울면 무너질 것 같았다. 무너지면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세면대의 물을 세게 틀었다. 두 손을 오므려 물을 받아 세수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고 어깨와 팔뚝, 여기저기에 튀었다. 눈을 질끈 감고 연거푸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눈에서는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 이건 물일 뿐이다. 나는 한참 동안 얼굴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내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재우가 말했다.
아, 맞다. 어제 술 먹다 휴대전화 던졌던 거 혹시 기억나? 그때 액정 나간 것 같은데.
휴대전화를 켜자 아무것도 없는 하얀 화면이 나오더니 금방 꺼졌다.
아...
먹통이야? 전화는 되나?
꺼졌어. 배터리 다 됐었나 봐. 나 어제 완전 엉망이었나 보네. 기억도 안 난다.
어제? 큭 이민준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는 했지.
하아... 지금 몇 시야?
음 11시.
부모님과 형이 잠든 새벽 3시에 나는 집에서 나왔다. 커다란 백 팩에 옷 몇 가지와 돈,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이제 이 방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덜렁 쉽게 들리는 백 팩이 아쉽게 느껴졌다. 책상 서랍을 열어 빠트린 것이 없는지 훑어봤다. 유리가 떠날 때 줬던 편지가 내 여권과 함께 보였다. 아직 뜯어보지 않은 유리의 편지를 들고 방 한가운데에 서서 가져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내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이 방을 뒤져볼 것이다. 그때 유리의 편지를 열어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편지와 여권을 챙겼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 거실로 나왔다. 안방과 형의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거실을 가로질렀다. 거실 벽에는 커다란 가족사진 액자가 걸려있었다. 작년 어버이날 형과 돈을 모아 아버지께는 캐주얼 재킷을, 어머니께는 스카프를 사드렸었다. 가족사진 찍는 날, 특별한 날엔 예뻐야지 하며 아버지가 재킷을 입으셨고, 그럼 나도 하며 어머니가 스카프를 두르셨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 ‘우리’가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처음부터 난 여기 어울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공기가 차가웠다.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을 천천히 닫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조용한 와중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굉음처럼 들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힐끗 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을 누른 후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민준아!’ 하며 따라오실 것 같았다. 이건 불효일까. 내 행동을 불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나는 떠밀리듯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17년쯤 살았던 이 아파트도 마찬가지고. 나는 후드를 잡아당겨 깊숙이 눌러썼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아닌 것처럼 길거리로 나섰다.
재우는 바빴다.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나에게는 있고 싶은 만큼 충분히 있어도 된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다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얹었다. 나는 서연에게 연락은 한번 해야 할 것 같아서 재우의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었다. 서연은 받지 않았다.
안 받네. 아직 자는 건 아닐 텐데.
휴대전화를 돌려주려는 찰나 재우가 켜 놓았던 다른 앱이 슬쩍 보였다. 전에 지하철 유리창으로 봤던 그 채팅창이었다.
집에 먹을 것이 없다며 재우는 배달 앱으로 황태해장국을 하나 시켜주고 나갔다. 재우 방 한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마시다 남은 2 리터 생수가 냉장고 문에 있었고 해물찜처럼 보이는 음식이 배달 용기째 들어있었다. 정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재우의 사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학교에서 보던 재우와 지금 이 방의 주인 재우가 동일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재우가 주문해 준 황태해장국은 금방 왔다.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국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회용 숟가락으로 한 수저 떠서 먹었다. 짜고 뜨거운 국물이 혀에 닿자, 없던 식욕이 올라왔다. 밥을 크게 떠서 국물에 적셨다. 한 입, 두 입. 부드러운 두부와 밥을 섞어 먹으며 나는 휴대전화를 봤다. 부모님은 뭘 하고 계실까 생각했다. 이미 여러 번 전화하셨을 것 같은데 망가진 휴대전화 탓에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지, 너무 속상해하시지나 않을지 걱정이 됐다. 부모님께 편지 한 통 정도는 쓰고 나왔어야 했나 생각했다.
편지.
나는 백 팩을 열어 유리의 편지를 찾아봤다. 짙은 초록색 편지봉투. 유리에 대한 뒤섞인 감정 때문에 열어볼 수가 없었던 그 편지. 이제는 담담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봉투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편지지를 꺼냈다. 사각 소리를 내며 편지지가 나왔다. 접힌 편지지를 펴자 유리의 글씨가 보였다. 처음 보는 글씨체였다. 만날 때 유리의 글씨를 볼 기회가 없었구나. 어설픈 첫사랑의 단면을 마주친 것 같아서 설핏 웃음이 나왔다. 유리의 글씨가 이런 모양이었구나. 힘주어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가 눈에 박힌다.
유리는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민준이 너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리 자신이 꿈을 찾은 것처럼 나도 꿈을 찾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때가 올 거라고, 그러니 자신이 됐든 내가 됐든 언젠가 상대를 찾아가기로 약속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호주에 있는 이모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놨다.
편지를 다 읽고 나는 다시 해장국을 먹었다. 두부와 황태와 콩나물을 우적우적 씹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할 수 있을지. 뭘 하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텐데. 사실 바르고 정돈되고 안락한 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바보놀음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 자식을 남에게 주고서 거머리처럼 돈이나 뜯어내는 생모가 바로 나의 핏줄이었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재우가 저녁에 돌아왔다. 어서 오라고 하자 재우가 주인과 손님이 바뀐 것 같다며 웃었다.
밖에서 봤는데 내 방 불이 켜져 있는 게 뭔가 기분이 묘한 거야. 원래 내가 들어와야만 불이 켜지는 방이었잖아. 맨날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는 게 나한텐 당연했었는데 민준이 네가 맞아주니까 뭐랄까... 마누라가 생긴 느낌이랄까? 못생겨서 딱히 마음엔 안 들지만. 큭
야,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재우는 바로 옆에 가정식 백반집이 있는데 가성비 끝판왕이라며 거기로 가자고 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재우를 따라나섰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재우의 외로움 속 깊은 단면을 들여다본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가성비 좋다는 그 집은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손님이 별로 없었고 재우와 나는 가게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재우가 주문하며 가게 주인과 아는 체를 했다. 재우는 불고기백반을, 나는 바지락 칼국수를 시켰다. 재우는 수저를 놓고 나는 컵에 물을 따랐다.
아무 말도 하기 싫겠지만... 재우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새벽 3시에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어디로 갈지 나는 정한 바가 없었다.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와 발길이 가는 대로 익숙한 길을 걸었다. 곧 전철역이 나왔다. 매일 전철을 타고 다니던 내가 나도 모르게 전철역으로 향한 것이다. 갈 수 있는 곳이 고작 전철역이라니.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첫차가 오려면 아직 두 시간도 넘게 남았다. 찜질방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태어나서 딱 한 번 가봤을 뿐인 찜질방에 이 기분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두운 길 한복판에 서서 나는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전철역 앞으로 다가왔다. 택시로 가서 기사 아저씨를 보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대림역으로 가주세요.
가족과 함께 사는 다른 친구들에게는 연락할 수가 없었다. 전에 재우가 대림역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충동적으로 재우네 집을 찾아간 것이다. 택시 안에서 재우에게 전화를 걸자, 머리맡에 늘 휴대전화를 두고 자는 재우가 바로 받았다.
어어.
재우는 잠에서 덜 깨어 제대로 말을 못 했다.
재우야. 자고 있었는데 미안하다. 나 민준이.
어, 어.
내가 지금 집에서 나와가지고... 갈 데가 없네. 생각나는 게 너여서 그런데 혹시 나 너네 집으로 좀 가도 될까?
재우는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중이었다.
일단 가서 얘기할게. 너희 집 주소 좀 알려줘.
재우는 비몽사몽 간에도 자기 집 주소를 정확히 알려줬다.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백미러로 나를 흘깃거리며 보는 게 느껴져 나는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재우의 집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 건너에 편의점이 보였다. 나는 편의점에서 소주, 맥주, 위스키를 보이는 대로 두어 병씩 집어서 계산대에 올렸다. 알바가 웬 이상한 녀석이 혼자 술을 이렇게나 많이 사가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더 집어서 갖다 놓고 다시 가서 어묵탕, 과일 통조림, 소시지, 오징어 등을 뭉텅이로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두 개의 비닐봉지 가득 술과 안주를 채워서 재우의 집으로 갔다. 재우는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봤다. 생경한 내 모습에 놀랐지만 재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냥... 이유는 없고... 그럴 때 있잖냐. 반항 같은 거 하고 싶을 때...
재우는 별 이유 없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지금 생각 정리 중이라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주문한 불고기와 바지락 칼국수가 나왔다. 재우가 가성비 끝판왕이라고 부를만했다. 젊은 사람들의 얇은 지갑 사정을 안다는 듯이 불고기와 각종 밑반찬이 푸짐하고도 깔끔하게 한상차림으로 나오는데 가격이 10,000원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시킨 바지락 칼국수는 1,000원 더 저렴한 9,000원이었는데 어른 주먹 네 개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대접에 뽀얀 국물 가득 바지락과 칼국수가 뭉근하게 풀어져 있었다.
쩔지? 먹자.
재우와 나는 수저를 들고 각자의 음식을 먹었다. 나는 뜨끈한 칼국수 국물을 후후 불며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재우는 젓가락으로 불고기를 한 움큼씩 들어 입안 가득 채웠다. 나는 밥을 먹다가 문득 재우의 손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뭐냐?
내가 고갯짓으로 재우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아, 이거. 며칠 전에 생긴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재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한 번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먹기 시작헀다.
재우야. 네가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혹시 말해줄 수 있어?
재우는 내 말에 움찔했다. 평소 친구들에게 농담 따먹기 같은 말만 하지, 결코 속마음을 말해본 적이 없는 재우였다. 의도와 다르게 내 말이 재우에게는 공격이 된 것 같아 부드러운 투로 다시 말했다.
따져 물으려고 하는 건 아니고. 저번에 지하철에서 한 번, 그리고 오늘 네 휴대전화 빌리면서 한 번. 네가 뭘 하는지 이미 아는데... 모르는 척하기가 더 힘들어서 물어보는 거야.
재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이 그나마 이 정도라고 살 수 있는 건 바로 그 일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지?
알고 있다고? 내가 뭘 하는지?
응...
내가... 뭘...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을 알려야 하는 고통과 수치심은 지금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는 기어이 그 단어가 나왔다.
마약.
재우는 내가 진짜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재우를 아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 내가 벌써 두 번이나 재우의 비밀을 봤다니. 허탈해했다.
전에... 그거랑 똑같은 모양 채팅창을 본 적이 있어. 그거 다크웹이잖아. 그런 내용의 챗 나누는 걸 다른 사람 휴대전화에서 본 적이 있어. 같은 버스를 탄 사람이었는데 내 앞 좌석에 앉아서 내내 그런 내용으로 챗을 보내더라. 그러다 나 봉사하러 가는 시설에서 내리더라고. 나는 시설 정문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시설 뒤쪽으로 가는 거야. 시설 뒤쪽은 아무도 안 다니는 공터라 느낌이 좀 안 좋아서 나도 뒤쪽으로 따라가봤는데 그 사람은 벌써 어디로 갔는지 없더라고. 이상하다, 저쪽은 길이 없을 텐데, 뭐지 하면서 뒤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시설 담장을 누가 훌쩍 뛰어넘어서 나오는 거야. 얼른 몸을 숨겨서 그 사람이 뭐 하는지 봤어, 야트막한 수풀 사이로 뭐를 찾아다니더라. 그러다 아주 작은 종이상자 같은 것을 집어 들고 막 급하게 뜯는 거야. 쪼그리고 앉아서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뭐 하는 건지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반짝하는 그 물건은 잠깐 보였어. 대번에 알겠더라고. 주사기. 대낮에 길바닥에서 마약을 하고 있었던 거야. 어이가 없더라. 여기가 한국 맞나 싶고.
재우는 내 말을 담담히 듣고 있었다. 확실하게 알고 말하는 거라 아니라고 우길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려고? 재우가 물었다.
어떻게 하냐니?
신고... 할 거야? 재우의 목소리가 한층 잦아들었다.
나는 재우를 신고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도 재우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친구로서 좋게 얘기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재우가 그렇게까지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어 심각해지자 이제 이 일의 엄중함을 깨달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재우의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그때, 마약을 파는 것. 마약 팔이가 되는 것만큼 내 거짓된 안락함을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의 현재는 아직 과거를 덧입고 있었다. 집에서 나왔다고 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이제 어울리는 옷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마약팔이는... 재우보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