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념하다

안녕, 나의 사랑.

제시어 : 빛바랜 기억

by 유념

기억의 유통기한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엔 디테일한 표정이 생각나지 않더니 점점 그 수가 많아져 이제는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뚜렷하지 않고 그저 흐리게 분위기만 기억난다. 사진이라도 한 장 남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가 떠나고 뭐에 홀린 듯이 관련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삭제하기 바빴다. 온 세상 모든 게 그일 정도로 사랑했기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괴로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가끔 그와 관련된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면 맞아 그랬었지 라며 공감하다가도 나만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 돌연 사라져 버릴까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나에게 내어주지 않으려 했을까. 자신이 떠나고 혼자 남을 나를 걱정하여 지레짐작하고 상처를 주며 있는 정, 없는 정 다 떼어내면 내가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을까. 아니면 혼자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을까. 어차피 다 들키게 됐을 텐데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분명 똑똑한 사람인데 어째서인지 나만 관련되면 어디 하나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점이 참 사랑스러웠지만 그래서 더 잔인했다.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는데.”

“이게 뭐 어때서. 여전히 멋있는데.”

“살도 너무 빠지고 볼품없어졌는데?”

“그래도 멋있어. 그러니까 이제 미운 소리 좀 하지 마. 그때 나 진짜 상처받았어.”

“미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더 예뻐해 줄걸. 소중하게 대해줄걸.”

“그럼 지금부터 해주면 되잖아. 계속 둘이만 이렇게 있자.”

“그래, 그러자.”


너는 나와의 시간이 나만큼 행복했을까? 부디 그랬길 바란다. 너의 마지막 기억이 고통이 아닌 행복이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남은 고통은 내가 온전히 모두 짊어지고 살아갈 테지. 그게 네가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