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모두가 같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대체 이 안경 따위가 뭐길래.
여느 날처럼 아빠는 티브이 앞에 앉아 9시 뉴스를 틀었다. 한참 두 명의 아나운서들이 세상의 다양한 소식들을 전해주다가 날씨를 알려주는 차례가 왔다. 화면이 바뀌고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예쁜 기상캐스터가 내일의 날씨를 알려주었다. 큰 일교차와 함께 추워질 테니 감기를 조심하라는 멘트에 나는 옷장 서랍 안에 처박혀 있을 두꺼운 스타킹을 찾으려 한참을 뒤적거리다 살구색 압박 스타킹이 손에 잡혔다.
"이거 입으면 되겠네."
잘 다려진 유니폼 위에 스타킹을 가볍게 걸쳐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건 춥지 않겠어? 더 두꺼운 검은색 기모 스타킹 있던데 그거 신지."
"안돼. 우리 규정 때문에 다른 색 신으면 혼나."
"그래? 뭘 그런 걸로 빡빡하게 군대?"
"괜찮아. 이것도 나름 따뜻해. 나 먼저 잘게.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며 방문을 닫았다. 아, 벌써 출근하기 싫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벌써 희미한 알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순간 가장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진정시켰다. 어제 일기예보대로 이불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찬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신속하게 준비하고 미리 준비해 둔 옷을 입었다. 나가기 직전 거울 앞에서 마지막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답답한 느낌이 조금 거슬렸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근무지에 도착하니 어쩐지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동료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못 들으셨어요? 오늘 아침 뉴스에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나왔대요. 그것도 도수 있는 안경. 그래서 화면에 그 아나운서 눈이 작게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거 보고 웃기다, 얼굴이 뭐냐, 늦잠을 잤냐, 눈화장도 제대로 안 한 거 같은데 전문성이 떨어진다 뭐 이런 말로 아주 인터넷이 시끄러워요. "
동료의 말을 듣고 얼른 휴대폰을 들어 "문제"의 그 장면을 찾아보았다.
"어머, 진짜네."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링을 한 여자 아나운서의 모습에 약간 놀랐지만 생각보다는 별 다른 느낌이 없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다른 동료가 커피를 들이키며 나의 휴대폰 화면을 가리켰다.
"근데 옆에 남자 아나운서도 안경 끼고 있는데?"
"저분은 원래 안경 쓰시잖아요. 지적인 이미지."
"다를 건 뭐야?"
그러게. 다를 건 뭐지.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근데 이게 그렇게나 이슈가 될 일인가?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된 이날의 사건은 몇 날 며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심지어 여자 아나운서의 안경 착용이 옳은가에 대한 찬반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아나운서는 꿋꿋하게 매일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행보에 어떤 이들은 열광하기도 또 어떤 이들은 욕을 하기도 했다. 식을 줄 모르는 분위기에 점차 새로운 행동의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아나운서를 응원하는 이들이 직접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 공들여 화장하고 살구색 압박스타킹을 신고 높은 구두를 신으며 출근했다. 딱히 달라질 점은 없었다. 그날도 역시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요? 식은땀도 흘리는데 괜찮아요?"
내 얼굴을 본 동료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약간의 더부룩함이 있긴 했지만 남이 느낄 정도로 티가 난다는 사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급히 달려갔다. 거울로 본 얼굴은 정말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의 꼴이었다.
"점심 먹은 게 체했나."
오늘따라 중식을 과하게 먹었던 터라 평소에도 소화가 잘 안 됐던 게 탈이 난 듯했다.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그제야 불편한 곳들이 속속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조금이라도 체기가 내려가길 바랐지만 턱도 없었다. 점점 울렁거리는 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애석하게도 어떤 작은 변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우선 이 답답함이라도 떨쳐내기 위해 구두를 벗었다. 온 다리를 휘감고 있는 압박 스타킹은 땀에 잔뜩 젖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낑낑거리며 내려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고 최대한의 힘으로 스타킹을 잡아 내렸다. 그 순간 투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스타킹이 살짝 찢어졌다. 덕분에라고 해야 할지 그 구멍을 잡고 더 찢어내니 그제야 완전하게 스타킹을 벗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막혔던 숨이 쉬어졌다. 차디 찬 공기가 폐 깊숙이까지 전해졌다. 땀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