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어 : 여름
여름의 끝에 서있다.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가 거짓말처럼 기세를 감추고 쌀쌀한 공기가 맴돈다. 귀신같이 날씨의 변화를 알아차린 나의 어떤 부분은 코를 간지럽히는 귀찮은 존재를 다시 끌고 와 잊어버렸던 삶의 불편함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 이 반복은 곧 다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오늘이 디데이 100일이래."
"무슨 디데이?"
"다음 연도 말이야. 이제 올해 1월보다 내년 1월이 더 가까워졌다는 소리지."
공포다.
어쩐지 매번 시간의 흐름은 느낄 틈도 없이 이렇게 대뜸 다가오는 것일까. 나 조차 알 수 없는 어떠한 의지가 힘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고 만다.
"너 얼굴 되게 심각해."
너는 손가락으로 나의 눈썹 사이를 살살 문질렀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왜 벌써 내년이라니까?"
"응."
"조금 허무하지?"
"응.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뭔가 해놓은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매번 그냥 지나가버리는 거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눈에 보이는 큰 결과가 아니더라도 작년보다 뭔가 하나라도 나아졌다면 그걸로 꽤 괜찮은 1년을 보낸 거 아닐까 하고. 근데 분명 누구라도 그런 게 있거든.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게 모두가 한 발짝 한 발짝 가다 보면 각자의 그럴듯한 길이 만들어지지 않겠어?"
"그렇겠네."
"그리고 그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날이 아직 100일이나 남았잖아."
그 말을 하며 너는 참 환하게도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말이 어쩌면 다음을 바라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