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절되지 않는 지하철 성범죄
엎어라 뒤집어라, 데덴찌, 덴디 등, 어릴 적 한 번쯤은 해봤을 편 가르기는 전국 편 가르기 지도가 있을 정도로 지역마다 동네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름마저 통일되지 못한 편 가르기를 보고 있자면 우리는 천성이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의문마저 든다. 우리 사회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 정치색, 연령 등 다양한 방법으로 편을 나눠 열심히 싸우고 있다. 그중에서도 남녀 갈등은 전 인구를 쉽고 간편하게 반으로 가르고 싸움을 붙이기 좋은 주제다. 갈등의 원인에는 결혼, 군대, 출산 등 다양한 주제가 있지만 잊을만하면 터지는 성범죄도 빠뜨릴 수 없다.
성범죄에서 비롯된 남녀의 갈등은 화장실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화장실의 표지가 없다면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의 변기 칸을 구별할 수 있을까?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여자들에게는 쉬운 문제다. 작은 구멍 하나하나 휴지가 꽂혀있거나 테이프로 막혀 있는 곳이 여자화장실이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불법 촬영에 얼마나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잘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예민하게 군다고 하기에는, 지하철에서 발생한 성범죄에 대한 보고가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여성 역무원이 화장실을 이용하던 중 불법 촬영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다행히 바닥에 고인 물에 자신을 몰래 뒤따라온 가해자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알아차려서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의 불법 촬영뿐만 아니라 열차나 역사 안에서의 성추행, 성희롱은 생각보다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피해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성범죄를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처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확실한 증거 없이도 피해자의 일관된 주장만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죗값을 치러야 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법조인이 늘고있다. 그 죗값에는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것도 포함된 터라 남자들의 두려움이 여성들의 불안함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남녀 승객 간의 사소한 다툼에서 여성 승객이 남성을 이겨먹기 위해 성범죄 피해를 주장하며 경찰에 신고하는 일들을 나는 실제로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범죄나 무고의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 나는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피해자를 목격한 뒤로 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승객이 뜸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 우는 젊은 여성과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중년의 남성 고객이 역무실을 찾았다.
"갑자기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서 봤더니 웬 남자가 막 도망가는 거예요. 가봤더니 이 아가씨가 울면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성추행당했다고. 제가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나는 피해 여성을 얼른 역무실 안쪽 소파로 안내하고 담요와 음료를 권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은 음료 한 모금 입에 대지도 못하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제가요······, 공황장애가 있어서 지하철을 잘 못 타요. 예전에도 몇 번······,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했거든요. 오늘 진짜 오랜만에 탄 건데······, 또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왜 저한테 자꾸 그러는 거예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요?"
떨리는 작은 어깨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위태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할까 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아마 역무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모든 직원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가까운 지구대에서 두 명의 남자 경찰이 도착했다. 선임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경찰분은 진지했고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골라 가며 피해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딱딱하게 들릴법한 법률용어를 사용해서 감정이 들어가는 것을 배제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피해자에게 상처 주던 옛날의 수사에서 뱉어졌을 법한 말들은 나오지 않았다. 곧이어 여성청소년수사팀에서도 여성 경찰이 한 분 나왔다. 여성 경찰이 도착한 이후로 모든 질문은 여성 경찰에게 맡겨졌다.
나조차도 이 사건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피해자는 어땠을까? 그러나 신고가 들어간 이상 피해를 진술하는 과정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진술해야 했고, 민망할 수도 있는 얘기도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도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모두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걸까? 피해 여성은 이제 울음을 멈추고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까지 가서 상황을 재현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 나쁜 놈 꼭 잡아주세요!"
이제 피해 여성의 목소리에는 당당함마저 묻어 나오고 있었다. 피해 여성을 데리고 왔던 중년 남성 고객은 도움이 더 필요하면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남기고 그제서야 역무실을 떠났다. 경찰들은 CCTV를 보기 시작했다. 역무원들은 가해자가 찍혔을 법한 CCTV와 역사의 지리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이제 역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성추행 현장을 비추는 CCTV가 없어서 피해 당시의 영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성추행 직전에 계단 밑에서 피해 여성을 불법 촬영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혔다. 불법 촬영 죄가 추가되었다. 모든 이들이 울컥 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명확한 증거가 남았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피해 여성의 가족이 도착했다. 나는 가족의 품에서 그녀가 실컷 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여기 지하철 직원분들이랑 경찰분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 정말 고마워."
늦은 밤 숨 넘어가도록 울면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범죄도 무고죄도 아닌, 피해자의 편에 설 것이다. 나의 부족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섣불리 여론재판에 참여하지 않고,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힘껏 도울 것이다. 그것이 다만 침묵하는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할 것이다. 피해자를 돕고 싶은 마음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서로를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하며 싸우는 것일까? 심지어 온라인으로 성범죄가 확대되면서 피해자들의 연령은 더욱 어려지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논쟁에 참전해 싸우고 있는 이들 중에, 과연 진정으로 누군가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저 미래에 내가 입을 수도 있는 손해에 감정 이입한 것은 아닐까? 혹은 가벼운 가십거리로 여기는 것일까? 우리가 진정 누군가의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기를 바란다면 아직 죄가 확인되지 않은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려고 신상을 털거나, 누구보다 마음 아플 피해자의 작은 흠을 들춰내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의 잘못으로 돌리는 언행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성범죄의 피해이든, 무고의 피해이든 말이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진 나머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때다.
그녀에게 그날의 일은 또 하나의 상처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지하철을 못 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했던 도움의 손길들이 딱지로 앉아 상처가 덧나지 않게 버텨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