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이제 벗어도 돼?
크로스핏만으로 몸이 좋아질까?
지난 8월, 땀에 젖은 옷을 훌렁훌렁 벗고 싶다는 욕구가 저절로 생기게 하는 무더위였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실제로 실천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크로스핏 박스다. 항상 박스에서는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괴성을 지르며 바벨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디 남자들 뿐인가. 여자들은 브라탑만 입고 등근육을 뽐내며 철봉에서 한 마리 돌고래처럼 우아하게 팔딱거렸다. 모든 운동에 저마다의 문화가 있다지만 크로스핏만의 이 독특한 문화가 처음에는 너무나 생소했다. 티 나게 시선을 피하자니 초짜 티를 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대놓고 빤히 쳐다볼 수도 없고. 크린이에게는 운동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시선처리도 어려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이런 문화가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다들 옷을 벗어? 벗는 다고 운동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별로 몸이 좋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남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옷을 벗는 다고 운동이 더 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옷을 벗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몸이 좋았다. 흔히들 말하는 조각 같은 몸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지방이 살짝 껴있는 포근한 조각들도 있었다. 하지만 와드가 시작되면 지방 아래에 있던 잠자던 근육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저 허벅지로 망치대신 못을 박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옹골찬 근육들이었다. 남편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거울 속의 자신의 몸을 유심히 보는 것이 분명 심리적으로 불편했던 것이 분명했다.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된 어느 날, 남편은 거울 앞에서 말했다.
"이 정도면 이제 박스에서 벗어도 될 것 같지 않아?"
실제로 남편의 등과 어깨 근육은 눈에 띄게 성장해 있었다. 몇 년 전까지 헬스로 키워뒀던 근육들이 크로스핏을 시작하면서 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심지어 한창 헬스를 하던 전성기 보다 더 커져 있었다. 특히 허벅지는 몰라보게 두껍고 단단해졌다. 헬스를 하던 당시, 남편은 등과 어깨에는 자신이 있지만 허벅지가 유독 크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허벅지 근수저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동작에서 하체 힘의 협응력이 이용되는 크로스핏이 그 잠재력을 깨워준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있었다. 그의 몸이 많이 좋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남들 앞에서 벗었을 때 아주 칭찬을 들을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근육만큼 성장해 있는 뱃살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남편의 뱃살을 빼보자고 결심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거울을 보고 있는 그에게 은밀하게 당근과 채찍을 내밀었다. 당근은 가능한 달콤해야 한다. 반응을 최대한 크고 활기차게, 옷을 입어도 근육이 숨겨지지 않는다 등 멘트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근 뒤에는 어김없이 채찍이 이어졌다. 하지만 결코 비난이 아닌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등이 와우! 허벅지가 무슨 돌덩이네!"
"그렇지? 이제 박스에서 벗어도 돼?"
"다 좋은데 복근만 만들면 백점이야. 복근만 만들고 벗자."
당근과 채찍으로 얼룩진 3개월이 지나고 남편은 다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보, 나 이제 박스에서 벗어도 돼?"
"뭐야? 복근 뭐야! 벗어! 막 벗어!"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6개월, 나는 처음으로 남편의 복근을 보았다. 항상 탱글탱글 만두처럼 푸짐했던 남편의 뱃살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여섯 개의 모닝빵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결혼 3년 만에 마주하는 남편의 복근이라니. 크로스핏으로는 몸을 키울 수 없다고 누가 그랬는가? 남편에게는 헬스보다 크로스핏이 더 효과적이었다. 이론적으로야 헬스가 예쁜 몸을 만드는 데는 최고지만, 그만큼 개인의 의지가 뒷받침 돼야 한다. 하지만 크로스핏은 시간의 제한, 정해진 횟수, 함께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부족한 개인의 의지를 보완해 준다. 또 덤벨과 바벨을 이용한 헬스 식의 보조운동을 해주면 충분히 헬스만큼 근육의 부피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칼로리를 태우는 고강도 유산소 운동도 동반되다 보니 과식만 하지 않아도 살이 저절로 빠졌다.
몸짱 남편과 살게 된 나만큼이나 난생처음 조각 같은 몸을 가져본 남편의 만족감은 컸다. 성형이나 약물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니 더 자랑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박스에서 헐벗고 땀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더운 척 자연스럽게 웃옷을 벗자며 복근을 공개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의 복근은 공개되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명절 삼일 동안 시댁에서 시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삼시세끼 챙겨 먹더니 볼부터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버렸다. 복근을 발견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말이다. 역시 어머니 집밥의 힘은 크로스핏보다 강력하다. 연휴가 끝나면 다시 당근과 채찍을 들어야겠다. 가자! 복근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