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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Feb 27. 2024

초보자의 장인정신

23년 Open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토투바하기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7개월 차에 접어든 2월의 어느 날, 우리 박스에는 갑자기 인질극이 벌어졌다. 회원들을 어떻게든 오픈(Open)에 참가시키려는 코치님들이 급기야 수건을 인질 삼아 협박을 시작한 것이다.


"수건 주세요."

"오픈 등록해야 드릴 거예요!"

"오픈 안 해요!!"

"그럼 운동 더하고 가세요!!!"

"아 쫌!!!!"


 나의 수건 구출작전은 치열했다. 떼도 써보고, 협박도 하고, 무력진압도 시도해 봤지만 결국은 수건과 함께 카운터에 갇히는 신세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풀업 50개, 푸시업 50개를 더 하고서야 겨우 수건을 구출할 수 있었다.


*오픈(Open):  크로스핏계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게임즈(Games)의 예선으로 전 세계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크로스핏터들만의 축제다. 오픈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핏터는 쿼터 파이널에 참가할 수 있고, 쿼터 파이널 상위 랭커는 각 대륙에서 열리는 세미 파이널 무대에서 경쟁을 벌인다. 이 세미파이널 성적을 가지고 미국에서 열리는 최종 결승인 게임즈에 참가할 선수가 결정된다.


'굳이 돈 써가며 망신당할 필요는 없지, 그렇고 말고.'


 코치님들의 노력에도 회원들의 생각은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픈 기록으로 전 세계, 국내, 박스 내 등수가 매겨지고 모두에게 공개된다. 괜히 20 달러의 참가비를 내고 내 부족한 실력을 박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식 기록인 만큼 진지하게 와드에 임하면서 평소보다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코치님들과 경험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고 수건을 사이에 두고 쫓고 쫓기는 동안 시간은 흘러 드디어 23년 오픈의 첫 번째 와드 23.1이 발표되는 날이 되었다.



<OPEN 23.1>

AMRAP 14 분


60 칼로리 로잉머신

50 토투바

40 월볼샷(남자 20파운드, 약 9kg/ 여자 14파운드, 약 6.4kg)

30 클린(남자 135파운드, 약 61kg/ 여자 95파운드, 약 43kg)

20 링 머슬업


로잉머신

 이 와드로 말할 것 같으면 우선 로잉머신을 60칼로리 타면서 다리부터 전신의 힘을 살짝 빼놓고, 토투바 50개로 전완근과 복근을 지치게 만든 다음, 월볼샷 40개로 다리와 어깨힘을 빼고, 클린 30개로 남아있는 팔다리 힘을 완전히 탈탈 털어 버린다. 그리고 그냥 해도 어렵다는 링 머슬업을 지친 상태에서 무려 20개나 시키는 것이다. 혹시나 14분 안에 1라운드를 끝낼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면 다시 로잉머신 60칼로리부터 2라운드를 진행한다.

'역시 나는 범접할 수조차 없군, 껄껄껄'


 그렇게 평소처럼 운동할 생각으로 도착한 박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와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발표된 따끈따끈한 오픈 23.1! 수건 인질극은 시작일 뿐이었다. 어차피 수업 시간에 하게 될 거 정식으로 측정하라는 것이 코치님들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작전에 정조준된 타깃이 되었다.


토투바

"토투바 되잖아요! 로잉 타고 토투바까지만 해도 RXD 하는 거예요!"


 할 줄 아는 게 토투바 밖에 없던 7개월 차 크린이인 나는 박스 와드도 RXD가 가능한 날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데 오픈을 RXD로 할 수 있다니. 수건보다도 달콤한 제안에 귀가 팔랑 거린 나는 어느새 로잉머신 위에 앉아 있었다.


* 로잉머신은 Scaled 없이 누구나 가능하지만, 토투바가 불가능하면 RXD로 와드를 수행할 수가 없다. 오픈에서는 Scaled로 아무리 많은 라운드를 해도 RXD로 수행한 사람보다 순위가 뒤로 밀리게 된다. Scaled 1등보다는 RXD 꼴찌가 순위가 높은 것이다. 그러니 토투바가 단 한 개라도 가능하면 RXD로 와드를 진행하는 것이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데는 유리하다.


 3, 2, 1! 타이머는 흘러가기 시작하고 박스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홀로 로잉머신과 지루한 사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너무 힘을 빼면 뒤에 동작에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천천히 꾸준히 탈 수 있는 페이스로 로잉머신을 타야 한다. 5분이 넘어서야 60칼로리가 채워졌다. 이제 토투바를 할 차례가 왔다. 나 같은 크린이에게 50개의 토투바는 너무나 많은 개수였다. 나보다 실력이 좋은 회원 중에서도 토투바에서 노렙이 대거 나와 50개를 채 끝내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노렙의 늪에 빠져선 안 된다. 나의 전략은 장인 정신을 담은 한 땀 한 땀 토투바! 남은 시간 9분! 나는 하나하나 신중하게 토투바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힘이 빠지면 충분히 쉬면서 노렙만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토투바만 끝내자! 토투바까지만! 한 개씩 진행되는 토투바는 노렙 없이 어느새 50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예상외의 나의 선전에 박스 회원들의 응원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7개월 차 만년 꼴찌 크린이가 드디어 토투바 50개를 채웠다.


*노렙: No Rap. 성공 횟수로 인정되지 않는 것.


월볼샷


 박스에는 흥분 섞인 응원과 칭찬이 쏟아졌다. 남은 시간 약 1분! 이제 14파운드 월볼샷 차례다. 모두의 격려를 받으며 첫 번째 공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목표 높이에 턱없이 모자랐다. 8파운드도 쉽지 않은 내게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14파운드의 월볼은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도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공을 던졌다. 이번에는 높게 던졌지만 벽에 맞지 않아 노렙.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아 있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 던졌다. 드디어 한 개가 목표 지점에 닿는 순간, 타임 오버!



 111 reps. 로잉 머신 60 칼로리, 토투바 50개, 월볼샷 1개를 RXD로 수행한 내 기록이었다. 오픈에 참여한 박스 여성 회원 6명 중 3등이었다.(재측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4등이 됐다.) 신중하게 노렙 없이 토투바를 진행한 내 작전이 잘 통한 결과였다.


'뭐지? 나 생각보다 잘하는데'


 그날 밤 나는 정식으로 오픈에 참석하기 위해 20달러를 결제했다. 그렇게 RXD에 혹해서 측정한 23.1을 선두로 나의 험난한 오픈 여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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