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 오억 명의 사람과 오조 오억 개의 고통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by 오지


고통을 느낄 때는 무섭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외롭다. 수술이 끝난 후 회복실이라고 마련된 공간에서 눈을 번쩍 떴을 때, 살아서는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찾아왔다. 옆에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들이 누워 있고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며 분주하게 왔다갔다 한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이 내게는 와 닿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고통만이 존재한다. 고통이 나를 집어삼킨 느낌이다. 뒤이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작은 움직임에도 엄청난 아픔이 밀려오기 때문에 멈춰야 한다. 그런데 몸이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떨리는 몸은 나를 고통의 아가리로 밀어 넣는다. 아프다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는데 들어가는 힘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고통이란 놈은. 손을 들어 간호사를 부르고 싶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을 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람도 나처럼 아파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 위안이 되었을까. 내가 겪고 있는 짐승 같은 고통이 죽음의 징후처럼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거라면 무서움이 조금 덜해졌을까.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간호사가 내 상태를 발견하고 의사의 허락을 얻어 뭔가 주사하고 나서 떨림이 멈추자 수술 부위의 아픔만이 남았다. 무서움은 지나가고 외로움이 남았다. 이렇게 아픈 거였구나. 아프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였구나. 이건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구나.


친구가 나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암이라고 들었을 때 억울하지 않았냐고. 난 아니라고 했다. 그런 것보다는 외로웠다고 했다.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고 살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어도 이런 종류의 외로움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에도 종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외로운 걸 그다지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의 나는 비교적 외로움과 잘 지내왔다. 외로움을 느꼈던 순간이 고통스러웠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소리 내 말하고, 글로 쓰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래 마음에 든 이야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얘기를 하면서 울기도 하는 내 모습이 무척 낯설다. 내가 직접 느끼는 고통을 말하며 울기보다 다이버들이 고래와 물속에서 장난치며 헤엄치는 영상에 빗대어 울음을 터뜨리는 쪽이었다.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 어떻게든 감추고 비튼 상태에서만 울음이 터지곤 했다. 내가 겪는 일로 울어도 되는 건지, 그게 합당한 건지 결론을 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수술실을 나서며 형광등이 켜진 복도를 누워 가로질러 가면서 어떤 터널을 통과한 느낌이다.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클리셰 같은 장면을 지나면서 이제 나는 좀 달라지겠구나 느꼈다.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알게 되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건 허세인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아팠으니 뭔가 달라도 달라야하지 않겠냐 같은. 하긴 그렇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다.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내 경험을 글로 쓰는 일은 그렇게 시작됐으니까. 용기를 모아야만 외출이 가능했던 나라는 사람이 내 얘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과연 대단한 변화였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서만 오는 변화는 아니다.


영화 ‘조커’를 보면서 그가 느꼈을 고통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린 시절의 학대, 망상과 신경증, 고단한 일상,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걸로 귀결된다는 당위는 성립되지 않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인간에게 존재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구나. 그의 고단한 일상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조커가 폭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고통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글쓰기로 아픔이 덜어질 수 있다던데. 일기를 쓰던 그에게 구원 같은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와 조커를 구분 짓는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연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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