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언의 <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사실을 말하자면 학창시절에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책을 읽고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바빴다. 만날 사람도 많았고, 가야 할 곳도 넘쳐났다. 말 그대로 1년에 책 몇 권 안 읽고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교과서 읽을 시간도 없었던, 그런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 읽었던 책을 돌이켜보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박노해 시집 등이 있었다. ‘데미안’은 담임이 선물해 주고는 독후감을 요구해 와서 어쩔 수 없이 읽었던 것 같고. ‘생의 한가운데’는 중학교 때 따라다니던 가수 이상은이 감명 깊게 읽었다고 추천해서 읽었다. 읽기는 읽었지만 제대로 이해한 문장이 있었나 싶다. 중학생인 내가 읽기에 좀 야했던 장면이 나와서 놀랐던 기억만 남아 있다. 나중에 엄마가 이 책을 읽고는 “책을 읽어도 꼭 그런 책만 읽냐.” 했다. 겁나 억울했다.
박노해 시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서 시위를 엄청나게 하던 시절이었다. 한양여중을 다녔던 나는 한양대에서 시위가 있을 때면 항상 최루탄 때문에 울면서 집에 가야 했다. 저들이 왜 저러는지 궁금했지만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유일한 노력이었던 것이 박노해 시집을 읽은 것이었다. 언감생심 시집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어려웠다. 소설도 이해를 못 하는데. 시집은 완전히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통째로 삼키는 기분이었다. 시어들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느낄 수 있는 희열만 남았다.
다독 측면만 강조하면 대단하다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만 했던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TV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처해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책 읽는 것이었다. 게임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가장 쉽게 생각해낼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던 유일한 것이 독서였다. 그렇게 살기 위해 읽었던 나날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다독은 되는데 깊이가 없다는 데 있다. 읽었던 책을 또 읽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루에 두세 권씩 책을 읽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제목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달리 생각할 수가 있겠나.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 역시 오랜 습관이다. 멋있어 보이는 일에 속절없이 꽂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