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연말연시가 되면 일년 중 어느 때보다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숫자가 있는 것 같다. 매년 새롭게 인식하고 기억에서 꺼내야 하는 그 해를 나타내는 네 자리 숫자. 연도가 하나씩 더해져 갈 때 그보다는 개별적인 ‘나이’라는 숫자도 하나씩 더해져 간다. 그러는 동안 네 자리 숫자보다 나와 친밀한 두 자리 숫자에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해의 연도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내 나이 두 자리 숫자를 헤아리고 기억하려면 다른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내가 올해 몇 살이었더라. 마흔은 넘었는데. 누군가 나이를 물어볼 때면(대체 왜 묻는 건지) 눈을 치켜뜨고 몇 초쯤 헤아리거나 아예 그럴 필요 없이 태어난 해의 네 자리 숫자를 말하면서, 상대방의 반응을 별로 기다리지 않고 할 일을 하거나 할 말을 했더랬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니. 광고 카피에 감정 이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게는 올해가 몇 년인지를 생각하는 것만큼 익숙해지기 어려운 숫자가 ‘내 나이’였다.
그러니 늙는다는 것이나 노화나 그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죽음에 감흥도 공포도 없는 편이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네가 아직 젊어서 그런 거라고. 젊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는 거라고. 과연 그런가. 그런 반응에, 나로서는 조금 억울한 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각해 봐야할만 한 병에 걸려봤고, 내 나이가 몇인지 금방 대답할 순 없어도 결코 젊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십대나 이십대에는 마흔이 된 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든다고? 그 나이되면 이제 곧 죽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철없는 생각을 했던 게 엊그제 같다. 어쨌든 죽음이 임박한(?) 나이에 도달해 있는 지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아, 뭐, 이 얘길 들으면 언니들은 또 한 마디 하겠지. 아직 팔팔한 청춘이구만. 니 나이면 뭔들 못 하겠냐. 쯧쯧.
그러다보니 노화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도 별로 없고, 자연히 두려울 일도 없었다. 그냥 살다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로만 생각했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티 에이징에 목을 매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됐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몇 년에 걸쳐 암이라는 병을 치러내고 그로 인해 내 몸에 대해 자연히 더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부터 내가 전에 없이 늙었다는 것, 기력이 쇠했다는 게 무언지 실감하게 됐던 것이다. 소감은 글쎄, 솔직히 반길만한 경험은 아니다. 운동을 하다가 조금 다쳐도 금방 낫지 않아 꼼짝없이 근육 쓰는 걸 아껴야 하는 입장에서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무한긍정의 힘을 갖지 못했으니. 늙고 병든 자신의 몸을 스스로 희화화해서 농담거리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래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여겨도 되나 싶다.
어쨌든 노화에 대한 내 레벨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나를 비롯해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 둘 병을 얻거나 대화 주제가 어디가 얼마나 불편하고 아픈지로 흐르는 요 몇 년 동안의 추세를 보면서 노화라는 것은 ‘상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올리브와 주변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상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 서늘했다. 올리브가 사랑한 아들 크리스토퍼가 성인이 된 후에 엄마인 올리브에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장면, 배우자인 헨리와의 사별, 주변 지인들이 겪는 다양한 인생의 부침들. 그 속에는 불륜도 있고, 다양한 사건ㆍ사고들이 있지만 가장 다가온 것은 노년의 인물들이 겪는 상실감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압도될 것 같은 상실감에 내가 준비돼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나이가 든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됐다.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이, 그럼으로 죽음에 한 발씩 다가선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책임질 일이 많아지고 그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걸 뜻하는 것 같다. 단순히 주름이 깊어지고 눈매가 흐려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이다. 우리가 동안에 열광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나 생활 방식을 칭송하고 부추기는 사회에 사는 동안 상실이나 보다 많은 책임감을 지는 것들, 그러니까 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외면은 늙었으되 마음가짐은 아직 미숙한. 그래서 노화와 나이듦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자기 나이도 매번 까먹고 마는. 그러니까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외면하고 싶었던 미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낸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그녀 곁에 앉은 이 남자가 예전 같으면 올리브가 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도 필시 그녀를 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올리브 키터리지」의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며 제대로 어른이 못 된 나란 사람에게도 기회가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란 말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면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기회는 또 오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갈구해야 한다. 명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