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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Mar 11. 2021

<세 자매>에게 구원이 있기를

영화 <세 자매>를 보고


영화를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는 등장인물 중 한 명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보는 것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마찬가지인데 드라마는 대개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는 점이 좀 다른 것 같다. 주인공에 감정 이입이 안 되면 드라마는 망한다. 영화에서도 중요한 요소이긴 한데, 경험상 영화는 그 스펙트럼이 좀 넓은 것 같다. 서사를 끌어가는 인물이 아니라 주변 인물이라 해도 충분히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게 성공이라면 영화에 대한 평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다르다. 영화 <세 자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들은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환경도, 대처하는 태도도 다르다. 장녀인 희숙은 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심지어 엄마에게 욕설과 함께 물컵 따귀 세례를 퍼붓는 고어족 스타일의 딸(봄이)에게도 “니 눈에는 엄마가 그리 그지 같나”라고 말하면서도 미안한 얼굴이다. 둘째인 미연은 자매 중 유일하게 부유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그걸 지키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지 잘 나타난다) 두 살 어린 남편의 외도를 비롯해 주변의 온갖 대소사를 도맡아 해결한다. 셋째인 미옥은 괄괄한 성격의 알코올중독자이자 극작가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착한 남편과 결혼해 살지만 주식은 술과 과자이고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라기보다는 남편의 돌봄을 받는 딸처럼 보일 지경이다. 의붓아들을 대하는 수준도 딱 그 정도다. 엄마라기보다는 집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누나 같다. 이 집안의 막내는 아들 진섭인데 존재감은 미미하다. 어딘가 아픈 사람(아마도 마음?)인 것 같은데 누나들이 보살피는 모습이 꼭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나는 장녀이고, 게다가 자매도 없지만 영화의 세 자매에 심하게 감정을 이입했다. 이게 이 영화가 갖는 장점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일단 세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잘했다. 인물들이 갖는 서사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혹은 한 번은 겪었을 일들, 그러나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고단한 집안일들. 남들이 보기엔 번듯하게 잘 살고 있는 둘째 미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남편한테 ‘미친년’ 소리를 들어가며 모든 걸 잘 하려고 애썼다. 웃긴 건 가정이 깨질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적반하장으로 책임이 그녀에게 쏟아진다. 그러나 괜찮다. 그녀는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어릴 때 아빠 빼고 온 식구가 다 죽어서 천국 가서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다던 그녀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셋째인 미옥의 경우는 대체 맥락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다.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나 술 마시고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는 모습 같은 걸 보면서 대체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캐릭터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극적인 서사를 가진 인물은 첫째 희숙이다. 남동생이 아픈 것도 자기 잘못이고, 남편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것도 자기 잘못이고, 딸이 엇나가는 것도 자기 잘못이다. 남편의 돈 문제를 해결해주고, 딸의 애정문제에 간섭하지만 가정의 대소사를 해결하는 방식은 둘째 미연의 방식과 상당히 다르다.

늘 미안하다 하는 희숙에게 미연이 말한다. 언니가 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 해. 그것도 미안하다고 한다.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늘 곁눈으로 보는 희숙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날 안 싫어할까”라는 말을 할 때 그녀 안의 두려움과 어린 희숙 그대로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딸에게 암이라고 하면서 “좀 무섭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용기일까. 아니면 집을 나가려는 딸을 잡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봄이 캐릭터도 만만치가 않다. 마지막에 긴장감이 터지는 신에서 “왜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소리를 못 하냐”며 욕지거리를 하던 봄이에게마저 감정이 이입됐다. 봄이가 엄마에게 함부로 할 때는 ‘애가 왜 저러나’ 싶었지만 정말 나라도 ‘이놈의 집구석’이 지긋지긋할 것 같았다. 이러저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괴하게 꾸민 외모에도 불구하고 옳은 말을 할 줄 알았던 사람은 봄이 하나였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당사자는 유리창에 머리를 깰 지언정 사과는 한 마디도 안 했지만.     

그렇게 세 자매를 비롯해 봄이에게까지 감정을 이입하고 난 후(그러니까 한바탕 울고 난 후) 같은 일을 겪은 자매의 삶의 방식, 태도 같은 걸 다르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고도 누군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잘 살아가고, 누군가는 완전히 망가진다. 그걸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미연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기야 세 자매 아버지에게도 하나님 아버지가 있었고, 미연의 남편이 외도를 하는 공간도 교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결론 내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단순히 교회나 종교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의지할 누군가, 믿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닐지. 어쩌면 거기에 정말 구원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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