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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Apr 30. 2021

잔인한 4월을 보내며

‘잊지 않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4월은 일년 중 가장 힘든 날이 됐다. 다짐한 대로 잊지는 않고 있는데(아무것도 안 하면서) 2014년 4월 이후로 4월만 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강력한 무기력증 플러스 우울증이 겹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 그게 괜찮지는 아닌 거여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는 ‘내일은 반드시 밖에 나가리라’ 다짐하지만 아침이 돼서 눈을 뜨는 순간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무한반복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날이 이어지는 동안 무기력한 나에 대한 자괴감에 빠지거나 하루를 보내며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순간마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어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에 나갔다가도 맥락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서둘러 집에 돌아온 적도 수 차례. 그러니 4월은 한달 내내 집안에 칩거하는 달이 돼버린 것이다.     


이번 해에는 공부까지 시작했다.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는, 시험이 있다는 핑계로 올 4월에 외출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애들 성화에 공원에 끌려 나가 아이들을 지켜보며 멍하니 있었던 날 외에 외출한 날은 채 3일도 되지 않으니. 온라인쇼핑과 택배라는 시스템이 없었으면 아마 굶어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란 인간에게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정하기 짝이 없이 시스템인지. 급 깨닫고 마는 것이다.

덕분에 책은 많이 읽게 된다. 책을 사러 나가는 것도 안 하게 되니 디지털도서관을 활용하거나 도서관의 택배대출 서비스를 이용해서 책을 보는데 평소라면 잘 읽지 않을 분야의 책도 많이 읽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죄책감은 염두에 두지 않을 일 중 독서만한 게 있을까 싶다. 어쨌든 이번 달에만 스무 권 넘게 책을 읽었는데 독서 취향보다 그저 읽을거리를 찾다보니 만족도는 조금 떨어진 것도 사실이나 간혹 뜻하지 않게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책 중 하나가 김이설 작가의 『읽어버린 이름에게』였다. 신경정신과를 다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인데 오래 곱씹어 생각해볼 이야기를 만났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임신 중에 ‘남자는 욕구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혼외정사를 승낙받고자 하는 남편의 요구를 마지못해 허락하는데 예상대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이 일은 인생을 관통하는 결정 혹은 선택 혹은 묵인이 되고야 만다. 한 번만 바람피우는 남자는 없다고 했던가. 남편이 이후에도 외도를 하고, 절친들과 동남아시아로 원정 성매매까지 하고 다니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주목했던 건 여자의 선택이었다. 아파트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하고 비상금을 모으길래 이혼을 준비하나 싶었으나 여자는 이혼을 하지 않고 남편을 망가뜨린(?) 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는 쪽을 택했다. 원정 성매매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의 부인들에게 연락해 그들의 행적을 고하고, 자식들에게 아빠라는 인간이 저지르고 다닌 일들에 대해 편지를 적어 알린다. 주변에 사실이 알려진 남편이 길길이 날뛰지만 여자는 악다구니를 쓰고 싸우면서 같은 지붕아래 산다.

얘기의 끝은 그랬는데, 마음이 참 답답했다. 당연히 주인공인 아내에게 감정 이입해서 이야기를 읽어갔는데 그 마음이 어땠을까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짐작컨대 여자는 임신했을 때 혼외정사를 묵인했던 일을 원죄라 여기는 듯했다. 남편에게 애정이 남아 있어서 이혼을 안 했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었고, 아이들도 다 큰 데다 경제적인 이유도 그리 크지 않은 듯했다. 자신이 했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려고 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어쨌든 일부나마 지고 가려 할만큼 잘못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복수는 양날의 칼이라는데. 그녀 입장에서 보면 나는 내가 던진 칼에 내가 찔릴까봐 두려워 복수는 접을 것 같다. 그러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책임’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잔인한 4월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세월호 7주기를 지내오면서 4월만 되면 도지는 어마어마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의 원인이 뭘까 생각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2014년의 상황이 어떠했든 나로서는 참사에 대한 책임을 아직까지 실감하고 있다.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에,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핑계로 나서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던 자괴감에, 이후에 진행되는 서명이나 자잘한 관련 일에 참여해도 변화가 없다는 데서 오는 우울함까지. 그런 감정들이 4월만 되면 파도가 치듯 밀려오는 것이다.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다니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세월호 유가족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정도로 해소될 감정이 아니다.

얼마 전, 경복궁 역 인근에서 촛불을 들고 2미터 간격으로 서 계시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우연히 만나 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분도 내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아주었다. 그건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짧고 가벼운 눈 맞춤과 고갯짓으로 전달이 되었기를 바란다. 물론 그것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년에도 4월이 올 것이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봄이 오는 게 두려울 만큼 여파는 있겠으나 그런 무기력과 우울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 동력이 될 것이라 한 번 믿어보고 싶다. 내 목에 들이밀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책임감이란 꽤 커다란 동력이 되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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