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기원을 알아내는 일은 왜 중요한가. 단지 비난하고 책임을 지울 누군가를 찾기 위해? 철저한 원인 분석을 통한 일의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어떤 일의 원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아챈 건 결코 사소하지 않은 대화에서였다. 큰 애, 즉 내가 결코 나와는 별개의 존재로 생각되어 지지가 않는 딸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이었다. 둘째인 아들아이가 유치원에서 여자랑 짝하는 게 싫다고 말을 꺼냈고(이것은 이것대로 문제다) 그 말에 동조하듯 딸아이는 ‘여자는 시시하고 재미없다’고 답했다. 자기는 그래서 남자가 되고 싶은 거라고.
유독 우리 애가 만난 여자 애들이 별나고 까다로워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건 주변 환경을 바꿔줘야 할 문제가 아닌가. 아니면 애가 벌써부터 성별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건가. 엄마로서 그동안 겪은 딸아이와 아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을 종합해보면 둘 다 아니었다. 아이는 제 입으로 ‘차별’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자신이 타고난 성을 부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린 시절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통에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언어가 되어 입을 통과하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말은 하고 있는데 속으로는 ‘망했다’를 주워 삼켰다. 말의 요지는 이랬다. 그래서 너는 차별받는 게 싫어서 가해자 편에 서려고 하는 것이냐고.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이가 멍한 얼굴로 ‘투쟁이 뭐냐’고 물었을 때쯤 정신이 돌아왔나 보다. 갑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투쟁’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했다. 아이는 되물었다. 지금 싸우라는 얘기냐고. 평소의 생각대로 답했다. 필요하면 그래야지.
솔직히 말하면 아이에게 이 대답은 한참 부족했을 것이다. 동생이랑 싸우지 말라는 소리를 하루에 이백사십 번쯤 하는 엄마 입에서 나올 대답도 아니거니와 타인과의 갈등을 엄청난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아이에게 불가능한 미션쯤으로 여겨졌을 것이었다. 더 안 좋게는, 그니까 싸우느니 여자 같은 거 안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러게 말이다. 왜 우리는 기본적인 권리를 꼭 싸워서 쟁취해야만 할까.
생각이 그쯤 이르니 여자인 내 처지가 가련하고, 딸아이가 겪을 일들이 예상되니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 겪었고 말 그대로 투쟁해왔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대가 한참 다른 우리들은 생각하는 것도, 사는 방식도 다를 것이고 그래야 마땅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과연 진보란 무엇일까. 과연 이번 인류에게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몇 번이고 데우고 데우다 마음이 졸아든 기분이다. 적어도 내가 느꼈던 그대로를 겪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가 처한 현실은, 비교적 잘 감추고 교묘하게 포장할 줄 알았던 내 경우보다 더 날카롭다. 현실의 칼날이 아이를 아프게 할까봐, 이미 징조가 드러나고 있기에 벌써부터 두렵다.
부모의 역할이란 곁에서 지켜보다 필요할 때 응원해 주는 것이라 하지만 명백히 잘못된 상황에 맞닥뜨린 경우에도 해당되는 얘기일까. 개입이 필요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능력은 어떻게 장착해야 하는 걸까. 더 문제인 것은 아이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에게서도 차별의 냄새를 명백히 느껴왔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가 최악이다. 애정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무심코 하는 말에 더 큰 상처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알고 보면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울 뿐만 아니라 가장 위험하기도 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