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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오지랖은 댁에 두고 다니세요.

타고나기를 자기중심적인데다 내 욕망과 욕구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어떤 점이 좋냐면 오지랖을 떨지 않는다는 거다. 나 역시 나름대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이지만 누군가에 대한 충고랍시고 납작한 지식을 들먹여가며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드문 편이다. 특별히 요청하지 않는 한 충고나 조언 같은 것도 잘 안 한다. 그래서 때로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이 맞기도 하니까.     


반대로 내게 오지랖을 떠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엄마 제외) 지난 시절, 그런 식의 소극적 공격(?)을 당했던 때는 채식을 할 때였다. 이십대 후반부터 임신하기 전까지 몇 년을 그런 소리를 듣다보니 사람들이랑 밥 먹는 자리를 불편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설명하는 것도 지치는 법이니까(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반복하는 것이다).

대답을 듣고 난 후에는 꼭 따라오는 레퍼토리들. 그래도 단백질을 섭취해야지(단백질이 고기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체 왜일까). 고기를 먹어야 에너지가 생기지(대체 무슨 근거?).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안 돼(고기만 먹는 사람한테도 이런 식으로 간섭 하나?). 채식을 하는 이유를 묻고 난 후에는 2절이 시작된다. 그런다고 공장식 축산이 사라지냐. 어차피 인간들을 위해 사육되는 동물이다. 식물도 고통을 느끼는데 모순 아니냐. 그럼 대체 뭐 먹고 사냐 등등. 하아. 지친다 지쳐.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출산 후 건강 문제가 생겨 육식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지만 원래 고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지라 작년부터는 다시 채식을 하는 중이다. 육식이 몸에 잘 안 맞는 타입인지 어쨌든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좀더 건강한 방식으로 채식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사람들의 간섭은 여전했으나 나를 둘러싼 조건 하나가 달라졌다. 누군가 왜 채식을 하냐고 물으면 웃으며 대답할 수 있다. “암 환자예요.” 그러면 대개는 그걸로 끝이다. 간혹 건강정보에 밝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암 환자라도 기운을 내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항암 중하려면 고기는 먹어야 한다 등등 2절을 내뱉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아, 저는 호르몬양성 암 환자라서 식단관리 차원에서 채식을 해요.”라고 대답하면 된다. 근거 있는 얘기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 그렇게 대답했는데도 3절까지 읊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암에 걸린 걸 좋다고 할 수는 절대로 없지만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좋은 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채식 하나도 이럴진대 아이를 키우다보면 세상의 오지라퍼는 다 끌어 다니는 돌연변이 매그니토라도 된 것 같다. 집안 어른들은 당연지사고 버스에서 만난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오지랖을 시전한다. 겨울에는 옷이 얇다, 여름에는 옷이 두꺼워 애 땀띠 생기겠다, 애 엄마가 그러고 다니면 쓰냐, 안 먹으려고 하면 뭐라도 먹여라. 정말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한 얘기를 들었지만 애들이 좀 크고 나서부터는 그런 일이 부쩍 줄어들었다.     

주변의 간섭이 다시 시작된 건 딸아이가 축구를 시작한 후부터였다. 그냥 대답 없이 웃음으로 퉁쳐 버릴 수 없는 집안 어른들의 오지랖.

“여자애가 무슨 축구야.” “축구선수 된대요.” “축구선수는 무슨. 다치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냥 취미로 시켜.” “거야 뭐,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죠.”

대화가 이렇게 흐르면 대개는 상대방의 못마땅한 표정이나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받는 타격은 거의 없다. 심지어 “너는 뭐, 애를 잘못 낳았어. 쟤가 저렇잖아…”라는 소리까지 들어봤지만(농담을 가장한 뼈있는 공격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이 탓인지 내공이 쌓인 건지, 나는 괜찮다.

문제는 그런 얘기를 꼭 애가 듣게 되는데(왜 꼭 그 사람 앞에서 축구공 리프팅을 하는 거냐. 못 말리는 인정욕구 중독자 딸램아!) 그런 경우가 문제다. “여자가 무슨, 축구는 좀 그렇지.” 그 사람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애한테 미움을 사게 된다.     


예의를 지키는 동시에 개소리에 진실을 말한다는 행위가 역설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이 둘은 모두 진정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칼 융은 “역설을 알아야 인생의 충만함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반영하지 않는 고정관념과 평가에 위축되지 않고자 매일 같이 싸우는 복잡한 존재다.

p. 76. 브레네 브라운.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나는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고 대체로 사람들의 무신경한 공격이 나라는 성을 뚫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아이가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언행을 제대로 대처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때 부모로서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일까. 아이를 위해서 그 앞에서 대신 싸워줘야 하나. 아니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아이에게 설명하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것으로 충분한가. 나는 내가 누군가를, 그의 관점을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에(내 앞에서 입을 닥치게 만드는 효과는 있겠으나) 대체로 후자의 길을 선택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 답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당사자인 아이에게 직접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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