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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축구가 뭐길래

스케치북 한가득 써놓은 단정한 글씨를 바라보면서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걸 느꼈다. 심호흡을 가늘게 한 번 하고 나니 내가 읽은 문장이 맞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고 나는 없는 가슴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가족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아이가 벌써 가족을 버리겠다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발단은 늘 그렇듯 별 일 아닌,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아파트가 아닌 한 건물에서 친척들과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집에서 다양한 공놀이를 해왔다. 덕분에 공기청정기 하나, 베란다 유리창 두 짝, 여러 개의 트로피, 그 밖의 자잘한 소품들 수십 개가 박살났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어릴 때부터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랄 수 있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몸집이 커지고, 축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날아오는 공의 속도와 강도가 점점 세지고, 그럴수록 서로를 이기고 싶은 호승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저 거실에서 일대일로 축구를 하는 것뿐인데 마음만은 월드컵에 나간 국가대표 선수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였다. 세레모니를 연구하면서 좋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상대방을 약 올리는 용도로 세레모니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딴에는 스포츠정신 운운하면서 아이들의 갈등을 중재해 보려고도 했으나 그럴수록 엄마 눈을 피해 상대를 도발하는 기술만 늘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경쟁심도 잘만 계발하면 동력이 되니 부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상대를 향한 도발이 극에 달했고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지경이 되어 앞으로 집안에서는 축구를 하지 마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사실상 특단의 조치라고 하기에 너무나 자주 써먹은 방법이긴 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나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일 하느라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벌어진 악다구니를 그저 끝내고 싶은 마음에 내뱉듯 선언한 것이었다. 일단은 일부터 끝내고 아이들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자는 마음이 강했지만 아이들은 내 상황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을 왜 그때는 깨닫지 못했을까.    

 

그런 연유로 ‘집안에서 축구 금지’ 조치 이후 며칠이 지난 후에 딸한테 그런 내용의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축구하는 게 너무 좋고 집에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엄마가 그걸 방해한다는 내용과 가족과 축구 중에 선택한다면 자기는 축구를 선택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눈을 의심했던 문장 하나. 우리 집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4명 중 3명(자기 맘대로 아빠까지 거기에 포함시킴)이니 축구하는 소리가 듣기 싫으면 엄마가 외출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외출’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내용상 “듣기 싫으면 엄마가 나가”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가족을 버린다”는 말로 받은 상처에 “엄마가 외출해”라는 문장으로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내 안에서는 ‘자식 키워서 무슨 소용’, ‘머리 검은 짐승’ 같은 낱말이 허황되게 떠다녔다.     


나로서는 조금 억울했다. 안 그래도 좋아하는 운동을 금지시킨 게 안타까워 딸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신문에 축하 편지를 보내놓은 상태였다. 제목은 심지어 “축구할 때 가장 빛나는 너, 응원할게”였다. 신문에 실리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신문에서 그 편지를 읽었을 때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앞으로는 동생에게 좀더 부드럽게 대할 것을 당부하면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딸아이에게 충격의 편지를 받기 바로 전날 밤에 나는 아이의 축구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편지를 신문사에 보낸 셈이었다.

그 일을 알 리 없는 아이는 내게 충격을 주고 일종의 협박(?)을 해서라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속셈이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나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서 받아든 날벼락 같은 편지에 마음 둘 곳을 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아하는 일을 금지당한 아이 심정만할까 싶긴 했다. 축구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데, 살아있는 것 같다는 데, 이유를 막론하고 축구를 (집에서) 못하게 된 아이의 심정을 부모인 내가 헤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에 관해서는 내가 져주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만 아이가 적어도 ‘가족을 버린다’는 말의 무게를 알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바람일까.

물론 내가 어마어마한 가족주의자는 아니다. 평소에도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주의에 숨 막혀 했던 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울타리가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기에, 아이에게 그런 존재로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던 내 욕심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부족한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말로 강조한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렇다. 그저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발화된 말을 거스르는 한 순간의 눈빛, 찰나의 표정 하나로도 인간은 그저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어찌됐건 아이가 축구도, 가족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일 자체가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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