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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선택의 무게

중학교에 처음 입학해 적응하는 것과 동시에 학생선수로 축구를 하게 된 아이가 버거워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본인은 여러 가지 이유(엄마가 축구를 그만두라고 할까봐 등등)로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지만 기본 생활이 엉망인 것을 보면 안다. 방 청소는 고사하고 물건은 의자나 침대에 쌓아놓고, 방바닥과 서랍은 쓰레기투성이에 아침에 등교할 때조차 양치와 세안을 거르기 일쑤다. 그러니 목욕이나 빨랫감 가져다놓기, 먹고 난 그릇 치우기 등 보다 고차원적(?)인 행위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훈련을 끝내고 차에 탄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를 참지 못해 기어이 후회하고 말, 한 마디를 날리기 전에 수를 써야겠다는 절박함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다른 아이들도 이럴까 궁금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같은 팀에 있는 누군가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3학년 선배 중 한 명도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운동선수를 지망하는 아이들 중에서는 꽤나 흔한 일인가보다. 평소에도 홈스쿨링을 나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오히려 단체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힘들어 하는 아이의 경우 부모의 의지만 있다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왔다. 옛날 어른들처럼 공교육에서 빠져나오면 세상 끝나는 식으로 생각하는 쪽은 아니었다. 흔히들 학교의 사회성 함양 어쩌고 하는 것도 과장된 것이라 결국 아이와 부모가 선택할 문제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학교생활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체육인으로 정체성이 확고한 듯했다. 그러니 그 아이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아는 척하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있고, 아이에게서 가끔 듣는 바에 따르면 관계도 꽤나 괜찮은 듯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없냐고 물어보면 “학교를 왜 그만둬?”라는 다소 퉁명스런 반응이 돌아왔다. 아이가 싫어하는 건 학교가 아니라 엄마가 주도하는 공부였다.

이 사태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건지, 여하튼 나는 전부터 아이에게 축구와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그것도 여러 번 했다. 아이는 축구선수를 못 하게 되면 갖고 싶은 직업도 따로 갖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가 원하는 그 직업은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군이었던 터라 사례를 들어 열심히 설명했다. 내용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너의 선택권을 보다 넓히기 위해서는 학벌도 중요하고 그러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아무리 챗GPT니 AI 시대니 떠들어대도 대학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 공교육 시스템에서 좋은 대학에 가는 일은 최우선 순위였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리 잘 늘어놔도 그건 나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 얘기를 듣는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나만큼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감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그냥 엄마가 또 옳은 소리를 하는 구나 정도의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자기에게 닥친 문제라는 걸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이의 동기부여가 아니라 학부모인 나 자신의 동기부여만 강화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아이가 축구선수를 하게 되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걸까. 사실 내 의문의 출발점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계에서 운동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는 게 국룰인가 본데 나는 우리 아이가 그 길에 들어서기 바라진 않았다. 축구선수로 대성할 재질이든 아니든 중학교 교육은 의무 교육인만큼 그 정도의 지식수준은 갖추길 바랐다.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을 하게 된 건 아이가 딱 학교 공부 따라갈 만큼만 성적을 내면 된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공부는 그나마 내가 아는 영역이었고 운동선수의 길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고는 운동을 하다가 그만둔 아이들의 청년기가 얼마나 암울했고 절망적이었는지, 그로 인해 가족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엄청났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아이와 함께 그 수렁으로 들어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런 과정의 결과, 아이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유지해나가는데 급급했다. 본인은 그런대로 현재 생활에 만족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냄새와 쓰레기와 아이의 피부 상태를 보면서 절망하고 있다. 아이의 여드름이 계속 눈에 띄는 것도 내 탓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할 곳이 전혀 없다.

다른 학부모들도 나처럼 우왕좌왕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집 아이에게 옳았던 것이 내 아이에게도 옳은 법이란 없고, 게다가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충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40년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데 누구 얘기를 듣겠는가. 듣긴 들어도 결국 내 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게 인생 모토인데 말이다.

이럴 때 나는 책을 찾았다. 논문을 뒤지고 전수조사 한 것이 없는지 자료를 뒤적거리는 류의 인간이다. 해외사례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참고하는 것이 망설여지고 우리나라는 이런 전수조사조차 있는지 의문이라는 게 문제였다. 학생선수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성적이 어느 수준에 오르지 못하면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한다는 정부 차원의 방침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도 겨우 낙제를 면해야 하는 수준을 요구하고 있으니 지적으로도 성장하고 운동도 즐기는 사춘기라는 나의 기대 수준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백지상태인 내가 모든 걸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자다가 놀라서 깰 만큼 두렵다. 참고할 수 있는 사례는 너무나 한정적이고 지나치게 개별화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내 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다. 다른 부모들은 대체 어떻게 이 과정을 겪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만 이렇게 헤매고 부딪치고 난리법석 부르스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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