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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모순

이것은 내 흑역사 중 하나에 대한 고백이다. 수년 전 독서모임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날 주제가 됐던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황은 또렷이 기억난다. 어떤 회원 한 명은 딸이 외출할 때마다 옷차림에 대해서 지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지적의 이면에는 성폭행이나 피해자, 행실 같은 단어가 있다는 고백이었다. 나는 부모 된 입장에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을 시키고, 혹여 나중에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행실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입방아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동조했다. 한 회원은 “진짜요? 피해자한테 왜 그런 말을 해요?”라며 놀랐지만 회원들은 적잖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순된 태도를 지적받자 나는 당황했다. 물론 피해자에게 하는 2차 가해를 정당화하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피해자가 극렬히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의된 성관계였다거나 심지어 피해자를 꽃뱀이나 가정파괴범으로 모는 현실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럴 때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평소 행실, 평판이 도마 위에 오른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수순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태도는 모순이라는 게 명백했다. 페미니스트라면서 딸에게 옷차림과 행실을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아이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태도였다. 만약 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자신의 행동이나 옷차림을 돌아볼 생각을 하니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내가 혹시 어떤 긍정의 사인을 주었나? 내가 그날 가해자의 성욕을 자극할만한 옷을 입거나 행동을 했던 건 아닐까? 내가 뭘 잘못 했길래 이런 일을 당한 거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제야 내가 뱉어낸 말이 변명도 통하지 않는 헛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또 하나, 어이가 없는 건 부모가 잔소리를 한다고 옷을 갈아입고 나갈 청소년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도대체 아이에게 그릇된 인식을 주는 기능 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옷차림 잔소리’가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애하고 사이만 나빠질 텐데 말이다. 부모로서 나라는 인간의 지각이란 이렇게도 근시안적인 것을 나는 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가.     


대체 나는 아이에게 원하는 게 뭔가. 이렇듯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경우가 아이를 키우면서 상당히 자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새로운 환경에 진입한 아이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아이가 마주하게 되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에 대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취하라고 조언해줘야 할까.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함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머릿속에 미리 상황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 백 개 삼킨 사람처럼 답답함이 몰려온다.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자기 뜻을 밀어붙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동안 내가 목도한 과정과 결과는 아이의 등을 정의의 편으로 쉽사리 떠밀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인 것을 알고 있다. 살면서 한 오라기 상처도 없이 평탄한 인생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아이에게 왕따나 학교폭력, 차별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이 들러붙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란 또 얼마나 모순적인가. 인생에 결핍이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지루하겠냐며 목소리를 높이던 나란 사람이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은연중에 엄마의 이런 모순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자신이 보았던 불의와 폭력에 적당히 눈 감아 달라는 멘트를 날리는 것이.

아이가 얼마 전 다른 팀과 경기 과정에서 보았던 것은 분명히 소속 팀 선수에 대한 폭력이고 아동학대였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훈련 중에 매일 벌어지는 일종의 연습경기였다) 골대 옆에 중학생 아이를 세워두고 성인남성(감독)이 공을 차서 맞히는 것을 달리 무슨 단어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광경을 처음 본 딸아이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우리 팀 감독이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가 이런 문제로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함께 묻어났고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착잡했다. 한편으로는 아이의 태도를 탓하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분쟁, 조정, 재판 등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모든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간 일을 하면서 지켜본 결과다. 그 또한 약자를 괴롭혀 입 다물게 만들려는 의도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와 가족이 겪게 될 인고의 시간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아직 아이에게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해. 그런 말을 부모로서 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을 못하겠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세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던 나는 그렇게 할 말을 잃었다. 나이가 들어도 알 수 없고 결론 내릴 수 없는 일은 사방에 널렸으며 어쩌면 죽는 날까지 이렇게 생겨난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죽겠구나 생각했다. 지천명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나름 진보적인 쪽,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이렇게나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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