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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페미니스트 엄마의 마음가짐

어떤 일이 시작된 상황에 대해 기억을 잘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아니다. 나를 통과하는 시간의 흐름은 뭉개지기 일쑤고 원인은 쉽게 왜곡되곤 한다. 내가 어쩌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했는지는 꽤나 중요한 주제인데도 정확한 날짜(언제 페미니스트가 됐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와 계기에 대해서 확실히 기억나는 건 없다.

그저 주변에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다니게 된 건 비교적 오래지 않은 과거라는 것만 안다. 어쩌면 처음 채식(동물권을 고려한다는 건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아이디어이기 때문)을 하게 된 이십대 후반부터 일수도 있고, 결혼과 동시에 갖추게 된 습관(일상에서 응축된 불평등의 현장을 매일 목도하게 되는 시점)일 수도 있겠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취지에는 동의하나 나는 그렇게까지 페미니스트는 아니”라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계기야 어쨌든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네오처럼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관례나 의례처럼 이루어지던 모든 일에 의문을 품게 됐고, 내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반추해 보며 불평등한 상황에 침묵했던 스스로를 참 부당하게 탓해야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런 상황이 반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다리는 나 스스로 이미 불태운 셈이었으니. 내가 발을 내딛은 세계는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의문투성이였다. 그렇다 해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혼란을 잠재울 방법은 끊임없는 질문과 성찰, 그리고 공부였다. 의문을 품는 것, 질문하는 태도 자체가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매뉴얼화 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어쩌면 가장 강력한 복병을 만났다. 자식의 문제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일진대 진로문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페미니스트의 올바른 해법이 될 것인지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질문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올바른 자세라고 해도 이런 질문은 가능하면 안 받았으면 했다. 내 문제에 대한 답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의 문제까지 올바르게 풀어가려니 새삼 부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나 할지 모르지만 가볍게 살아온 결과가 이렇다는 걸 떠올리면 자식문제만큼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는 내게 첫 번째 관문 같은 시험을 남겼다. 축구를 하겠다고 하는데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는 문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딸아이가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해묵은 걱정과 참견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 과정을 나와 아이가 함께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거기에다 내가 명색이 페미니스트인데 딸아이의 축구의지를 꺾을 명분이라는 게 과연 합당한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로 살다 보면 피곤한 것 중 하나가 자기 검열. 게다가 자식 문제니 말하자면 이중의 갈등을 처리해야 했다.

여자애라서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테고 과거에 비해 저항도 덜할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변화는 더디다. 내가 어렸을 때 듣던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얘기가 따라 붙는다. 다만 변명처럼 뒤에 덧붙이는 문장 하나 생겼을 뿐. “하긴, 근데 요즘이 어떤 시댄데.” 진보와 발전의 속도는 딱 그만큼이다.

아이의 기대와 희망 섞인 눈망울을 보면서 그런 모든 과정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아이와 마주한 내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선 자기 검열과 그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한다고 해도 결국 나란 존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인간으로서 날 때부터 탑재하고 있는 모순이 뼈아팠다.     


그랬기에 처음 시작은 그저 취미로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사그라 들겠지.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반대할 순 없어도 내심 ‘알아서 그만둬주면 좋겠네’ 정도의 애매한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패착은 축구라는 운동을 잘 모르는 데서 왔던 것 같다. 아니, 나란 사람 자체가 운동과 워낙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다보니 어떤 운동에 빠진다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무지했으니 안일하고 타협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대와는 달리 아이의 축구사랑은 갈수록 더해졌다. 열이 펄펄 나도 축구장에만 가면 날라 다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스니 공격수니 하는 얘기가 종종 들렸고 그때마다 나는 ‘취미로 하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잘하는 건 아닐 거야’ 위안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정말 실력이 좋아서 어느 학교 감독님 눈에라도 들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다.     


내 안의 갈등 상황을 종료시켜 준 건 뜻밖에도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여자애가 무슨 축구야’부터 시작해서 ‘운동은 취미로 해’, ‘운동하다 그만두면 나중에 아무것도 못 해’까지. 운동선수로 학창시절을 보낸 지인 누구누구의 실패담은 차고 넘쳤다. 마치 자식을 운동선수로 키운다는 것이 자식 덕으로 집안을 일으켜볼 심산을 깔고 있다는 암묵적 룰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걱정이라며 토해내는 말들. 그 말에 아이는 무방비로 노출됐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나는 화가 났다. 그냥 하고 싶은 걸 얘기했을 뿐인데 미래의 결과까지 담보할 수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라는 말은 폭력에 가까웠다.

내가 누군가.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여러 번 비틀어버린 게 나란 사람이다. 오히려 지인들의 무신경한 조언은 내 안의 반골 기질을 작동시킨 트리거가 됐다. 미래고 투자고 뭐고 모르겠고 나는 그냥 저런 말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졌다. 적어도 내 앞에서,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세상 무해한 얼굴로 늘어놓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됐다.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그냥 나 하나만은 애 편이 되어주자고. 그 이후로 내 안의 모순과 갈등은 별 고민거리가 안 됐다. 앞으로도 아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문제를 마주했을 때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여러 번 오겠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될 것 같았다. 아이 편이 되어 주자. 그게 엄마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 아니겠나. 그렇게 자족적인 자만심에 빠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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