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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왜 하필 축구야?

어쩌면 이 말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관계가 꼬인 건 아닌지 그 뒤로부터 한참 동안 고민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일면 억울한 것이 맨 처음 아이가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이는 미묘한 뉘앙스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해온 운동들,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은 다 어쩌고 이제 와서 다른 운동을 또 시작하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못마땅함.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축구 교실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 또 알아봐야 한다는 번거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떠오른 귀찮음. 분명히 마주치게 될 여러 가지 차별의 언어들을 대할 자신 없음 등등. 짧은 반문에 어떠한 의도가 없었음을, 아이의 판단을 재단할 시도가 아니었음을 아무리 항변해도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이미 아이는 벽에 부딪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그 전까지 주변에 축구를 하는 여학생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곧 초등 고학년을 앞두고 있는 학년이었고, 3학년 이후부터는 엄마들이 예체능 학원을 다 끊고 교과목 관련한 학원으로 아이들을 몬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던 터였다. 내 방침에 따라 아이들은 교과목 관련한 어떤 사교육도 받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릴 때부터 수영, 리듬체조, 태권도, 롤러 블레이드 같은 운동과 관련한 사교육만 받아왔던 것이다. 또 이 모든 게 내 탓인 걸까.

축구가 완전히 낯선 종목은 아니었다. 큰 아이와 달리 작은 아이는 유치원 때부터 축구를 배웠고 딸애가 축구를 접하게 된 계기도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이 다니던 축구교실을 참관하던 날 이후 아이가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했고 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3학년만 돼도 운동하는 여학생은 드물다. 그나마 초등 고학년까지도 갈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태권도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아이들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엄마들이 원해서다. 4학년, 5학년만 돼도 여학생들은 그렇게도 발랄하던 쉬는 시간에 비해 체육시간만 되면 소극적으로 된다. 온갖 핑계를 대가며 체육시간마다 참관하는 아이들도 생기고 대개는 여학생들이다.

그런데 축구라니. 당장 둘째가 다니는 축구교실에 여학생도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군데 전화를 돌려 알아봐야 한다는 짜증이 아마 배어나왔을 것이다. 성가신 일이 생겼군. 엄마의 표정에 둔감한 아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학교 방과 후 교실도 그렇고, 집 근처 문화센터도, 둘째가 하는 축구클럽에도 여학생들로만 꾸려진 팀은 없었다. 아예 시작을 말든지 남학생들과 함께 축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당시 아이에게는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나는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예상하는 바 남자애들과 함께 하는 축구도 마뜩치 않을 것이 분명했고, 한 번 말을 꺼낸 이상 축구를 아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강습을 받는 동안 기가 죽어 있을 아이의 모습과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다른 남학생들의 모습이 펼쳐졌다. 어떤 것도 흡족하게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딸애는 남학생들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오히려 고학년이 되어서까지 남학생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어쩌나 내심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아이가 남성이나 여성에 대해 어떤 편견 같은 걸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늘 예의주시하던 터였다. 그러나 운동장이라는 영역에서도 그게 통할지 의문이었다. 예상하기로는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던 남사친이 함께 축구를 배우더라도 딸애에게 말을 걸거나 연습 게임할 때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것 때문에 받게 될 아이의 상처와 그로 인해 갖게 될 고정된 인식이 두려웠다. 운동장은 저들에게 허락된 공간이고 여자인 나는 이곳에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언제나 손님일 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까 겁이 났다. 그걸 열 살이란 나이에 감당하게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내 예상대로 진행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오만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사십년 이상 살아온 이 사회는 그런 규범 내에서 움직이는 곳이었고 나 또한 그런 규범 내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거나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걸 겪기에 아이가 너무 어린 건 아닌지, 혹은 너무 여린 건 아닌지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그렇게나 많은 생각과 심사숙고가 동반되어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었다. 둘째가 축구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는 이런 과정 자체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특권이란 드러나는 것이기 보다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 안에서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딸애는 또래 여학생들과 함께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에서 자동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서 배우게 되었으니 일주일에 두 번씩 운전을 해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하나를 해결하니 그에 따른 또 다른 문제가 뒤따라왔다.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하는 둘째까지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것, 1시간 넘게 (둘째와 함께) 바깥에서 아이를 기다려야 하는 것, 퇴근 시간에 걸려 평소보다 30분 이상 더 걸리는 교통지옥 문제. 다녀와서 식구들 저녁을 챙겨야 하는 문제까지. 가기 전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도 없고, 모든 게 완벽하게 처리되는 경우도 없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혹은 착각)은 이제 버려야 했다. 아이가 축구를 시작함과 동시에 내게도 그런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런 경험은, 계기는 흔치 않다는 걸 안다는 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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