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낳은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이는 집요했다. 얘한테 이런 구석이 있다는 걸 미처... 끙, 아니다. 사실 유치원 다닐 때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태권도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도 태권도에 보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었더랬다. 당시만 해도 뭘 잘 몰랐던 나는 태권도를 배우면서 부상을 당할까봐 지나치게 걱정을 했고(실은 나보다 남편이 더 걱정했다), 예체능이든 뭐든 사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요구를 묵살했다. 눈물을 흘리며 소극적 저항을 하는 아이에게 어려서 알아듣지도 못할 이유를 들먹이며 거절했다.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졸라댐(?)에 결국은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해서 일곱 살이 되던 봄부터 태권도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그리 허용적인 부모는 아니다. 부모의 네 가지 유형(억압적인 부모, 권위적인 부모, 허용적인 부모, 방임적인 부모) 중 권위적인 부모에 가깝다. 주위 부모들이 대개 허용적인 면을 많이 보여 아이들의 의견을 깊이 들어주고 공감해주지만 나는 별로 그런 편이 못 된다. 사교육(그래봐야 예체능밖에 안 하지만)을 하더라도 몇 번 하고 끝낼 것은 시작도 못 하게 한다. 적어도 6개월은 해야 돼. 그게 시작의 조건이다. 늘.
어쨌든 아이가 등록한 태권도의 유아반은 부모들이 와서 참관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애만 보내는 부모도 있고, 일주일 정도 와서 지켜보는 부모도 있지만 내 경우는 한 달이었다. 부모와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경우는 기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도 하는데 한 달 이상 지켜보는 부모는 별로 많지 않았다. 평소 성품상 아이에게 지극정성이라 그랬다기보다는 딸아이가 보이는 불안증세 때문이었다. 당시 둘째가 어려서 늘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둘째를 붙잡아가며, 잠깐 쉬는 시간마다 와서 울음을 터뜨리는 큰 애를 달래기 위해 거기 있어야 했다. 말이 그렇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들은 “애가 아직 어린데. 이렇게 일찍 시작할 필요 없어요. 우리 애도 초등 2학년 때 시작했는데. 쯧쯧.”이라며 나를 꽤나 극성스런 엄마로 못박아두고 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했다. 제가 원해서 보낸 거 아니거든요. 그렇게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매번 그렇게 대꾸할 수도 없는 일. 그냥 사람들이 극성맘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더 편했다. 어쩌면 그럴 에너지가 아예 없었거나.
그런 말이나 불편한 시선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시작된 증상 하나가 “이걸 그만 둬, 말아”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게 만들었다. 수업을 하는 50분 동안 화장실 들락거리기만 예닐곱번. 지하에 있던 도장에서 2층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파른 계단을 아이 손을 잡고 여섯 번 일곱 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이리저리 날뛰는 네 살짜리 둘째 손까지 붙들고 좁은 계단을 셋이나 나란히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불안감을 느꼈던 딸아이가 말로만 들었던 오줌소태 증상을 보였던 것이다. 소리에 특히나 민감했던 아이는 사범님이 큰 소리로 구령을 할 때마다 놀랐고 사무실에서 지켜보던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엄마들이 애잔함과 연민과 짜증스러움을 한꺼번에 느꼈겠지만 내 심정 또한 그랬다. 그러기를 한 달, 아이가 사범님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큰 목소리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서인지, 급하게 구해다 끓여 먹인 옥수수수염물이 효과를 본 것인지. 어쨌든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연을 만들어낸 태권도는 지금까지도 계속 하고 있고, 국가공인 삼품까지 땄는데도 멈출 기색이 없다. 어디 그뿐이랴. 태권도가 적성에도 맞는지 구에서 하는 대회에 나가서 1등상까지 타기도 했다. “이제 고학년인데 그만해도 되지 않아?” 하면 아니란다. “엄마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랬잖아.” 헐. 대체 그 끝이 어디까지냐고.
그런 성정이다 보니 3학년부터 시작한 축구 강습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기둥 뒤에서 울다가 좀 괜찮아질만 하니까 코로나로 인해 기약 없이 문을 닫게 됐다. 아놔, 아이의 집요함이 또 한 번 발동된 시기였다. 이번엔 축구로 종목이 바뀌었을 뿐. 실내에서 하던 강습이라 방역조치에 따라 쉬게 된 데다 남자아이들 틈에서 마음에 상처를 내가며 하는 게 내심 못마땅했던 나는 이번 기회에 아이의 열정이 식어들기를 은근히 바랐다. 사람이 왜 배우는 게 없는지. 자식이 어떤 기질인지 외면하고 싶었을까. 그게 뭐든 이번에도 지는 쪽은 나였다. 인터넷에서 서핑에 서핑을 거듭해 여성을 대상으로 축구강습을 할만한 사회적 기업을 찾아냈고 대표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연락은 바로 왔다. 여자아이 어머니가 직접 연락해 온 경우는 처음이라고. 감사하다고 적었다. 이게 감사할 일인지 약간의 의문을 갖고, 어쨌든 한시름 덜었으나 고생은 이제 시작이었다.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축구교실이다 보니, 우리 동네에는 아예 없었고,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다른 구에서 하는 교실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인데 차가 막히는 때에는 왕복 3시간 운전을 해야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둘째까지 데리고서 말이다.(그나마 커서 말로 통제가 가능한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컸다고 분리에 따른 불안에서 오는 눈물바람이나 오줌소태 증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또래 여자아이들과 함께 여자 코치님한테 배우는 데 신이 나서 말 그대로 날아다닌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는 공 한 번 차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꽤나 재미있어 보였다. 열명 남짓한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운동복을 갖춰 입고 구령에 맞춰 ○○○여학생FC라는 소속감을 느끼면서 하는 운동이라.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네. 비록 내 어린 시절은 억압으로 얼룩졌어도 딸아이의 일상이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