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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Sep 28. 2023

어떤 선택

1996년작 <트레인스포팅>의 인상적인 인트로 내레이션은 ‘선택’하는 일의 지겨움을 명료하게 열거한다. 동의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삶을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며 “그래서 헤로인을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엥?). 그런 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핵심은 인간에게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숙제인지, 선택의 무게란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지에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매 순간을 다 선택할 수는 없으니,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 같은 것들은 루틴으로 만들어 놓고 선택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다른 데 쓸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게 이른바 ‘미라클 모닝’의 출발인데 그런 걸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럼 매일 똑같이 살아야 돼?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미라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미라클 모닝은 그걸 뜻하는 게 아니고, 아침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면 뭔가 하루도 생산적일 것이고, 그런 날들이 쌓이다보면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하는 일이 잘 돼 결국엔 돈을 많이 번다는 것 같았다. 요즘 모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성공’으로 귀결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선택이란 아침에 뭘 먹을지, 먹는 것과 새벽 수영 사이에 어떤 루틴을 끼워 넣을 지와 같은 다양성의 추구에 있다. 내게 살면서 경험치 쌓는 것과 다양성만큼 중요한 키워드는 없기에 매일 뭘 먹을지 정해두고, 일어나서 뭘 할지가 결정된 삶만큼 이상한 인생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만큼 나는 선택이란 인생을 알록달록하게 만드는 양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나라도 모든 선택이 달갑지는 않다.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올 게 뻔한 선택지 앞에 놓여있을 때는 괴롭다. 미루고 싶고 피하고 싶다. 아니면 누가 대신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타로 카드 도움이라도 받아보고 싶어서 카드 읽는 법을 배워보긴 했지만, 타고 나길 신기와 거리가 먼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 길에 재능이 1도 없다는 걸 깨닫고서 때마다 카드를 펼쳐놓는 일도 그만두었다. 하긴 아무리 대단한 타로 마스터라고 해도 자기 앞에 놓인 길 위에서 모든 선택을 타로 점에 의지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얄팍한 삶일지. 어차피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참고나 조언의 용도로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안전하고 잘 되는 길만 갈 수 있는 대단한 예지능력을 갖고 있다고 그 인생이 다채롭고 재미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니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인간은 빼도 박도 못 하고 고심 끝에 선택하며 사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고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살아왔는데 커다란 난관을 만났다. 가끔은 내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해야 할 일이 있다. 대개 자식이나 배우자 등 가족 문제다. 부모나 배우자는 성인이니까 내 의견은 타로 점과 같이 참고용일뿐.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선택의 무게를 내가 지고 갈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

자식 문제는 다르다. 자식이 어릴 경우엔 더더욱. 선택에 따른 후과가 내게도 밀어닥친다. 그래서였다. 내게 놓인 선택 앞에서 나답지 않게 여러 날을 고민했던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비교적 분명한 삶을 살아왔기에 선택에 고민이나 후회가 별로 없는 편인데 이 문제는 시작부터 달랐다. 딸아이가 처음 “엄마, 나도 축구 할래”라고 했을 때 선뜻 “그래, 해”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복합적인 것이었다. 고민 되는 선택이 대개 그렇듯 한두 가지 이유로 결정을 망설이게 되는 일이 드물다. 아이가 내게 던진 숙제 앞에서 나는 왜 망설였던가. 축구는 남자만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아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있으면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나 범죄만 아니라면 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납득이 안 가는 행동이었다. 어디에서 축구를 배워야 할지 알아보는 과정이 귀찮아서? 주변에서 들어올 압력이나 온갖 오지랖으로부터 아이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거친 운동이니 혹여 다칠까봐 겁이 나서?

그건 내 행동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보단 이 모든 것이 인절미 버무리듯 버무려져서 아이가 한 말을 한동안 못 들은 척 하도록 만들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 밀려왔다 잦아드는 파도 같은 욕구이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는 생각보다 집요했고 나는 태도를 설명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마지못해 “한 번 찾아보자”라고 대답했을 때만 해도 이 여정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선택은 했으되 우린 길 끝에 도달하지 못했고 아직도 균형을 잡아보려 애쓰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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