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 그림일기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엔 사람에 관한 세 가지 질문이 나온다. 사람 마음속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장 돋보이는 질문은 마지막 질문이다.(제목을 보시라.) 그런데 어쩐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진 건 두 번째 질문.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
사실 그렇다. 아무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애써봐도, 당장 내일 아침 내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이 될지는 영 알 수가 없다. 그저 지금껏 쌓아 온 경험들이, 준비해 온 것들이 곧 내게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용하길 바랄 수밖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지금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들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은 가슴 시린 일도, 나중에 돌아보면 좋은 방향으로 틀 수 있도록 한 지렛대가 될 수 있겠지.
그래서 요즘 맞게 된 급격한 환경 변화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분갈이' 시점이 된 거다.
처음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대체 무엇이 자랄지 알 수 없던 흙밭이었다. 물과 햇빛, 양분을 꾸역꾸역 받아 먹으며 이리로 저리로 발을 뻗다 보니, 처음 보는 싹이 하나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 방향으로 자랄까. 거기에 신경 쓰다 보니 전처럼 양분 흡수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게 됐다. 이 싹, 더 넓은 곳에 제대로 뿌리를 박도록 해 보고 싶다. 그 생각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런 중, 화분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이 싹이 어떻게 자랄지는 모를 일이다. 30년 남짓한 내 삶엔 급격한 변화가 꽤나 많았다. '꽂힌 것에 인생을 걸겠다'는 각오로 임해놓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엉뚱한 길을, 그것도 매우 열심히 달렸다. 지금은 또 다른 길로 눈을 돌리고 있다.
내가 쌓아온 것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느낀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내게 필요한 것을 아는 능력. 그런데 말을 좀 바꾸고 싶다.
내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한동안 불필요했다고 여겼던 일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돌아보면 아, 필요했구나 하게 되니까.
오직 이 길뿐이라 믿고 달려가던 때 그토록 열심히 만들고 쌓았던 것들은 진로를 바꾸면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들이 되고 말았다. 한동안은 그렇게 보낸 시간을 '흘려보낸', '낭비한' 세월이라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더 지나 보니, 그 불필요해 보였던 것들이 모여서 지금을 이루고 있다. 중구난방으로 틔웠던 싹들, 돌보는 걸 잊어서 이미 사라졌을 거라 여겼던 싹들이 어느새 뿌리를 단단히 내렸다. 상상하지 못한 색의, 모양의 다양한 꽃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그 힘 덕분에 지금, 무엇으로 자랄지 모르는 새싹을 더 넓은 곳으로 옮겨 심는 중이다.
그렇게, 피어난 꽃들과 새로 틔운 싹, 앞으로 품게 될 여러 씨앗들을 소중하게 안고 나아가 보겠다. 내 정원이 얼마나 풍성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혹시 모른다. 어느 순간 키워왔던 꽃과 나무들이 모두 쓰러지고 딱 한 그루 나무만 남을지. 그러나 그 나무도 결국 내가 키워낸 식물의 몸을 거름 삼아 자랄 테니.
그러니까, 필요 없는 경험이란 없다. 다 '필요했던 경험'으로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다. 지금을 충실하게 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