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 그림일기
어린 시절 나는 픽션(fiction) 마니아였다.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 생기면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속편을 써대며 한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특히나 유럽식 '판타지 소설' 장르에는 사족을 못썼다. 말 타고 달리며 칼과 활로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 여기에 마녀나 마법사, 그리고 불 뿜는 용까지 등장하면 말 다 한 거다.
이런 소설 중에서도 (아마도 내게만)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주인공에 대한 판타지랄까. 어떤 우여곡절을 겪든, 유약해 보이든 말든, 그래도 끝까지 선한 사람이라야 좋다. 아니면 영 이입이 안 된다. 리얼리즘을 외치는 시대에 이런 설정의 인물은 단면적이고 유치해지기 쉽다고들 한다. 어쩌겠어, 취향인걸.
처음으로 '반해버린' 판타지 소설은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사자왕 형제의 모험'. 현실에선 가난하고 연약하기만 했던 형제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다시 만나 겪는 모험을 그렸다.
사후 새로운 세계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판타지인데, 책의 주역인 '사자왕' 요나탄은 정말 이런 소설에나 등장해야 어울릴 인물이다. 금발의 훤칠하고 잘생긴 소년이 용기 있고, 현명하고, 정의롭기까지 하다. 엉뚱하게도 내가 반해버린 건 이 부분.
"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자네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데도 적을 못 죽인단 말인가?"
"아무튼 목숨을 빼앗는 것만은 못하겠어요."
오르바르와 마티아스 할아버지는 그런 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네 같다면 죄악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텐데."
-사자왕 형제의 모험(창작과 비평사) 중에서
독재자의 폭정에 맞서는 반란군의 마스코트 격인데,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부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더 큰 뜻을 위해 결단을 내릴 줄 아는 리더상은 아니니까. 그래도 내겐 이게 더 매력적이었다. 완벽한 리더는 아닐지 몰라도, 그래서 악을 직접 뿌리 뽑지는 못해도, 끝까지 선한 본성을 지켜서.
그 뒤로 푹 빠져본 판타지 소설은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다. 가상의 나라 바이서스를 배경으로, 초장이 후보인 열일곱 소년 후치 네드발과 그 일행-독서가/경비대장/엘프/드워프/마법사/가출한 왕자/도둑/간첩/성직자(인간, 트롤)/항구의 소녀-이 대륙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드래곤을 저지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 겪는 모험 이야기다.
장편이라 에피소드도 많고, 등장인물도 많다. 그러니 한 마디로 요약할 순 없다. 지금 드래곤 라자를 떠올린 건, 주인공들이 끝까지 선하다는 이야길 하고 싶어서. 등장인물 가운데 완벽한 사람은 없다. 각자 흠이 있고, 혼란을 겪고, 다투기도 한다. 그래도 끝까지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해리 포터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지. 다음 권이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동안 안달복달했지만, 끝나지 않기를 바랬던 소설. 주요 인물을 둘러싸고 약간의 반전은 있었지만, 어쨌든 선한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위의 두 소설과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입이 덜 됐던 느낌은 있다. 왜 그럴까. 아직 덜 자란 주인공이 가끔 보여주는 삐뚤어진 말이나 행동에 화가 나서? 그런 이유였지 싶다. 시간 될 때 찬찬히 다시 봐야겠다.
어쨌거나, 현실성이 없다 지적이 있더라도, 나는 착한 주인공이 좋다는 얘기다.
착한 사람은 안 나오는데 끝까지 열심히 본 드라마는 딱 하나 있다. 미국 넷플릭스가 제작한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엄청난 속도의 전개, 표면만 봐선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말, 행동, 그들이 서로에게 놓는 덫.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시즌 끝까지 정주행 할 정도로 흡인력 강하다.
그렇지만 끝 맛이 늘 좋지 않다. 상상을 초월하는 모략이 오가며 영 좋아할 수 없는 인물들만 나오는데, 그들이 정말 현실에 있다는 걸 아니까. 씁쓸하다.
어제였다. 아이유의 새 앨범을 들으며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뭐지, 이 가사는. 나랑 똑같은데?
공들여 감춰놓은 약점을
짓궂게 찾아내고 싶진 않아요
그저 적당히 속으면 그만
무지개 뒤편엔 뭐가 있는지
너무 멀어서 보이지가 않아요
대단한 걸 상상할 수밖에
그렇다 해도 안경을 쓰지는 않으려고요
속고 속이고 그러다 또 믿고
상상을 하고 실망하기도 바쁜데
-아이유, '안경' 중
가사 그대로다. 현실은, 현실을 겪으면 깨닫기 싫어도 깨달아진다. 꿈에 잠겨 살 수 있는 시간, 마냥 세상을 장밋빛으로만 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 마냥 좋게만 보이는 때도 다 한 때다.
기왕 싫어도 깨달아질 거, 조금 늦게 알면 어때. 좀 속아주면 어때서. 비판적 사고가 참 부족한 셈인데, 이런 사람도 세상에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우겨본다.
충분히 현실을 알게 된 지금도 난 여전히 착한 주인공이 좋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을 거란 믿음을 잃지 않게, 그래서 나도 조금은 더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해주니까.
그래서, 안경 없이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