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좀 깁니다

[무념무상] 그림일기

by yoong

발가락이 좀 길다.


말 그대로다. 아니, 솔직해지자. 사실은 많이 길다.


키 163cm,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 신장. 그런데 발 길이는 250mm쯤 된다. 엄마는 내 키가 한 170cm까지 자라지 않으려나 기대하셨다지만, 그냥 팔만 좀 길게 자랐다(슬프지만 다리는 아님). 그리고 이 남다른 길이의 발에서 특히나 발가락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양말에 구멍난 걸 확인한 직후 늘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 신발 벗을 일 없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다섯 발가락이 각각 모두 길고 발가락 사이 간격이 넓다. 특히 두 번째 발가락 길이는 남다르다. 엄지 발가락 정도는 우습다는 듯 발 끝에서 툭 튀어나왔다. 전체 발 그림을 보면, 눈썹을 잘못 그리는 바람에 눈썹 산이 불쑥, 급경사를 그린 것 같달까.


이 기다란 발가락들은 과장 약간 보태 'semi 손가락' 기능을 충분히 해낸다. 가령 책상 위에서 떨어지는 펜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재빨리 발가락으로 받아낸다거나.


움직이는 게 영 귀찮아 드러누워 있을 때 손 대신 뻗어 물건을 집어 올리기도 쉽다. 그보다 훨씬 정교한 움직임도 가능하다. 음, 사실 어릴 땐 TV 리모컨 조작도 발가락으로 해봤다. 잘 했더랬다.


이렇게 써놓으니 긴 발가락이란 꽤 편리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점을 늘어놓아봐도 내겐 참으로 불편하고, 남에게 보이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 그래서 가능하면 늘 아늑한 운동화 속에 숨기게 되는 게 나의 발가락이다.


왜 양말 속이 아닌 운동화 속인가. 늘 맨발로 다닌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설명하자니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그래도 솔직해지자.


양말에, 혹은 스타킹에, 구멍이 매우 자주 뚫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톱을 바투 깎아도, 튼튼하고 쫀쫀하다는 양말을 신어도, 강력(!) 스타킹을 신어도, 결과는 늘 비슷하다. 출근하고서 서너시간 지나보면 느낌이 온다. 살짝 신발을 벗어 확인하면 두 번째 발가락이 어김없이 얼굴을 쑥 내밀고 있다. 나는 소리없이 탄식하며 속으로 말한다. 네 얼굴, 그냥 집에 가서 봐도 괜찮은데.


왜 매번 구멍이 뚫릴까. 고민 끝에 최근 모험을 감행했다. 남성용 양말 가운데 가장 작은 사이즈를 사서 신어봤다. 아, 이럴 수가. 드디어, 온종일 신고도 구멍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다니.


그렇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뭐지, 나, 발만 남자인 건가. 다음 날, 다시 여성용 양말을 신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어김없이 두 번째 발가락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너는 왜 또 나왔니.


그리고 다시 남성용 양말을 신었다. 그랬다. 구멍따위, 뚫리지 않았다. 남성용 양말 재질이 특별한 건 아니다. 똑같은 면 양말이다. 그저 내 발가락 길이에 맞는 양말은 여성용이 아닌 남성용이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자존심 세울 문제는 아니다. 사람마다 발 크기도 생김새도 구조도 다르다. 단지 양말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여성용 250mm 사이즈와 발 모양이 좀 다르게 생긴 것뿐이다. 양말의 발가락 부분은 모자라고, 뒷꿈치 부분은 조금 남아 바짝 당겨 신다보니 늘 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났던 거다.


연인, 반려자를 만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툭 튀어나온 내 두 번째 발가락처럼,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은 의지만으로 바꾸기 어렵다. 그걸 억지로, 원하는 틀에 맞추려 하면 신는 사람도 괴롭고, 양말은 터지고 만다. 발가락이 유별나게 길다면, 그걸 감싸줄 수 있는 넉넉한 사이즈의 양말을 신으면 된다.


발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양말을 찾으려면 내 모습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내 안의 어떤 면이 양보할 수 없는, 두 번째 발가락 같은 부분인지. 그리고 어떤 면이 조금 사이즈가 헐렁하게 남아도,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인지. 내가 상대에게 모든 걸 다 맞춰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겸손이나 이타심이 아니라 또다른 교만이다. 평생 발가락을 구부린 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뭐, 일단 내 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신발은 여성용 250mm, 양말은 남성용 제일 작은 사이즈. 나 자신에 대해선, 좀 더 스스로를 돌아보고 곱씹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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