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 그림일기
계획 짜는 걸 좋아한다.
긴 주기로는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인사철, 계절이 바뀔 때. 그럴 때면 거창하게 펜과 노트를 들고 앉아 심사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짧게는 매달 마지막 날, 가끔은 주말에도 계획을 짠다.
이렇게 말하면 나란 사람,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어야만 할 것 같다. 당연하지.
.... 그렇지 않다는 게 당연하지. 계획 세우길 좋아하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계획적인 사람'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참으로 치밀할 것만 같은 계획이란 작업. 하지만 그 작업을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이 '충동'이라는 게 아이러니.
내가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대충 이렇다. 수없이 머릿속에 쌓아 둔 '하고 싶은 일 목록'에서 몇 가지를 골라낸다. (늘 사람 영혼 하나에 딸린 몸이 왜 하나뿐인지 원통할 만큼 하고픈 일이 많다.) 골라내는 기준은 단순하다. 지금 당장 착수하지 않으면 못 배길 만큼 안달 난 일부터.
다음,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쪼갠다. 꼭 해야 하는 일-출근이라거나-을 고려해서 하고픈 일에 착수할 시간을 만든다. 다행히 아침잠이 적으니까, 가능하면 출근 전 시간에. 그리고 자기 전 시간. 이동 시간. 기타 등등.
그 시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의 양을 계산해 넣는다. 이 단계에선 좋은 말로 '열정'이, 정직한 표현으로는 '과욕'이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나는 좀 교만해지곤 한다. 내가 안 해봐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이 쯤은 금방. 이런 객기.
그 결과,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나온다. 연말에 세우는 새해 계획대로 산다면, 사람이 하루 24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로는 최대치를 채우는 느낌이랄까.
그대로 한 해를 보낸다면 나란 존재가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될 거란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다. 계획을 써붙여둔 것만 봐도 절반은 이룬 느낌이다.
그래서 좋아한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공기 중으로 끄집어내 그려보는 작업. 그게 실천 가능한 일이냐 아니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손에 잡힐 것 같은 공간으로 끌어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거다. 실천은 그다음 문제.
나 혼자일 땐 이 정도로 괜찮다. 하지만 집단이 관여하는 일이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심해 잠수 계획을 세운다거나.
더 곤란한 건, 생각했던 것보다 세상엔 나 같은 사람, 다시 말해 '계획 세우기 좋아하는 충동적인 사람'이 참 많다는 사실.
덕분에 요 며칠 사이에 새로운 계획에 몇 번째 착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라앉았다 반복하며 마음국물이 찐득하리만치 졸아드는.
처음엔 그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여다보니 그냥, 나 같은 사람들이 방향키를
쥔 것뿐이다. 나는 화 낼 자격이 없다.
아마 그들도 나도 영영 충동으로 계획을 짜는 성격을 버리진 못할 거다. 그러니 늘 실수하고, 무리하고, 계획이 틀어지곤 하겠지. 그걸 짜증으로 받아내는 대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걸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계획의 실패와 수정이 아니라, 새로운 계획 짜기의 시작으로.
예정대로 되는 일이란 건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