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괜하지 않은 상상

[무념무상] 그림일기

by yoong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고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 아직은 내게 특별한 경험이다. 거리가 얼마나 가깝든,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이든(내가 자주 다닌다는 이야긴 아니지만).


가장 두근대는 순간은 이륙 직전이다. 무사히 내 자리를 찾아왔다는 안도감. 일상을 벗어나기 직전의 흥분. 그리고 가장 신나는 통보.


"나 곧 비행모드."


무선통신망, LTE란 속도로 무장까지 한 인터넷망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난다고 선언하는 일. '공식적으로' 휴대전화가 연결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라 확인받는 일. 동네방네, 그렇게 "나 연락 안 될 테니 그리들 알아." 이렇게 떠들고 나면, 어쩐지 속이 시원하다. 뭐랄까. 든든한 방패막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무사히 이륙하고 나면 평화가 시작된다. 어딘가로 '날고 있다'는 약간의 흥분, 기대. 그리고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고립상태. 평소 너무 솔직해서 신비주의와 거리가 먼 내가 티끌만큼은 신비해졌다-싶어 뿌듯한, 유치한 설렘을 가슴에 안고 비행을 즐긴다.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고.

"승객 여러분, 기류가 불안정해 동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안전띠를 매 주시기 바랍니다."


둥실둥실 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바짝 쫄아든다. 승무원이 태연한 얼굴로 통로를 오가도 안심이 안 된다.


재빨리 사고 시나리오를 그린다. 바다 위일까, 산 위일까, 도시 위일까. 아니면 사막? 그럴 수도 있지.


고립된다면 이 여객기 안의 사람들과 잠시 가족이 되는 셈인데. 이 사람들과 얼마나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울다가 지쳐 쓰러질 사람은 어떤 사람? 도망갈 사람은 누굴까. 봉사에, 혹은 구조 요청에 앞장설 사람은? 아기는 얼마나 있지.. 외국인은? 한국인은?


"지금 안전띠 표시등이 꺼졌습니다. 자리에 앉아계실 땐 가급적..."


...조난 기간, 내 맘대로 임시 가족이 될 뻔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싱겁게, 원래 각자의 자리로, 나와 상관없는 타인으로 돌아간다.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다시 안전띠를 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한 번 더 남았다. 어린 시절 접한 잡지식이란 무섭다. 파일럿, 짝 등 줄거리는 이미 가물가물한 항공 드라마에서 가장 큰 고비로 묘사됐던 순간. 착륙.


안전띠를 다시 조여보며(말을 잘 듣는 편이라 웬만하면 풀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본다. 보고 싶은

얼굴들, 비행모드를 설정해 둔 시간 동안 벌써 소식이 궁금해진 사람들. 지금 무사히 착륙하지 못한다면- 가족 외에 정말 나를 생각하며 눈물 흘릴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와 관계를 쌓은 사람들에게, 우리 강아지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혹은 몇 사람이나 나를 기억할까. 그보다, 세상에 어떤 기억을 남길 정도의 삶을 살긴 했나. 더 따뜻한 말과 마음을 나누지 못해 후회되는 사람은 누구지. 어떤 말을 더 하고 싶었더라. 어떤 글을, 그림을?


쿠궁. 묵직한 마찰이 느껴진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활주로에 닿은 바퀴는 착륙의 충격을 안고 앞으로 내달린다.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지금 인천공항에 막 착륙했습니다."


최근 중국의 천단공원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둥그런 세 층 지붕의 제단 주변을 잘 가꾼 숲이 둘러싸고 있는.

안개 자욱한 새벽, 빛을 머금은 대리석을 밟고 제단 위로 올라서면 황제 눈 아래 펼쳐지는 구름 아래 세상. 황제는 제사를 지내기 전 구름 위, 세상 위를 거니는 경험을 매번 했단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신과 백성 사이의 자신을 깨닫고 가다듬는 시간. 끊임없이 자신을 일상에서 떨어뜨린 채 살피는 시간을 강제로 가진 셈이다.


나 역시, 거리가 좀 길더라도 비행기 타는 게 좋다. 지상, 일상에서 반강제로 떨어지는 경험. 다시 나를 느끼면서도 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 평소엔 결코 알 수 없는 그 묘한 긴장과 흥분을 두려워하고, 또 즐기게 된다. 괜한 상상이 낳은, 괜하지 않은 결과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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