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지만, 시작해야 할 때

[무념무상] 그림일기

by yoong
이사간다_.jpg 마치 요새처럼 둘러쌓았던 책을 허물고, 인사 발령 기념 사무실 책상 정리.

정리정돈이란 가슴 뻥 뚫리듯 속 시원해지는 작업이다. 특히 나처럼 한 번 맘 먹고 정리할 땐 뭉텅이로 내다 버리는 사람에겐 더더욱. 묵혀놓고 쌓아두다 짐이 되어버린 것들을 시원하게 '짐'으로 인정하고 나면, 어쩐지 내게서 교만함을 어느 정도 덜어내는 기분도 든다. 내 한계를 인식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남긴 채 덜어내는 것.


속 시원한 동시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그동안 착각해온 게 무엇인지 정면으로 마주 봐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내 그릇을 실제보다 크게 평가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마주해야 하는 부담은 꽤나 무겁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자주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주기적으로 반드시 해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워줘야, 다음을 채워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그 정리정돈의 시기가 좀 빨리 왔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하게 되는 정리란, 별로 속 시원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내가 맞게 덜어내고 있는 건가,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질 뿐. 그렇지만 시간이란 내 사정 따위 별로 봐 주지 않으니까. 불안하든 말든 지금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손에 쥘 공간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황급히 손에 든 걸 뭉텅이로 정리했다. 결국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하기보다, 눈을 질끈 감고서.


그리고 이제 출발선 앞으로 발을 옮기고 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걸 버린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을 가득 품은 채.



베개_일요일.jpg 의욕과다로 시작한 하루. 생각이 너무 과했던지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이 쌓여서(...) 어느새 하루 끝.

눈 앞의 일도, 지나온 등 뒤의 일도, 지금의 내 마음도 잘 모르겠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바보 상태다. 하지만 바보의 시간도 일반인과 똑같이 흐른다. 지금 서 있는 출발선에서 곧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릴 거다. 나는 좋으나 싫으나 일단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하겠지.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좀 소심한 다짐을 하며 숨을 고른다. 너무 빨리 걷지 말자. 발이 자동으로 움직이더라도,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가지 말자. 내 눈과 귀, 입, 그리고 내 마음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만큼의 시간을 갖고 가야지.


틱낫한 스님이 전하는 베트남의 속담은 다음과 같다. "공동체를 떠난 수행자는 파괴될 것이다. 산을 떠난 호랑이가 인간에게 잡히듯이." 내 식대로 고치자면, 삶의 수많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행복해하고 괴로워하라. /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그래, 나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무감각해지고 싶지 않다. 그러느니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기뻐하고, 감정과잉처럼 슬퍼하고 울고 웃고 싶다. 그러자면 '효율적으로' '재빨리' '앞만 보고 직선으로' 가선 곤란하다. 눈 앞에 펼쳐진 여러 가지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발은 그대로 움직여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출발 총성이 울릴 때까지 5분가량 남았다. 새 날이 밝으면, 제 속도로 걸어 가야지. 월요일, 새 아침, 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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