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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May 23. 2023

5월, 생각의 흐름을 따라서

김유원 장편 소설 <미확인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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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희는 까만 구멍을 골똘히 쳐다봤다. 희영이 던진 돌이 공중에 떠 있다가 가루가 되어 빨려 들어가는 걸 숨죽이고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라졌다. 희영이 던진 돌처럼 감쪽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p40)  

 <미확인 홀> 김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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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확인 홀’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김유원 작가의 소설<미확인 홀>을 읽던 도중 SNS에서 [매년 10만 명씩 사라지는 일본인 ’증발하는 사람들’]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르포 사진집<인간 증발>에 관한 기사로, 일본에서 매년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발’하고 있으며, 그중 8만 5천 명 정도가 스스로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사에 등장한 ‘자발적 실종’ 이유는 사업 투자나 진학 실패, 해고, 빚, 이혼 등 당사자에게 충격과 좌절,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닥치는 경우다.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일본 사회 분위기가 이들을 더욱 극한으로 내몬다고 하는데, 개인마다 각자의 삶에 중요한 가치와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니, ‘자발적 실종’의 이유는 더욱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돕는 업체가 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고객들이 남은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 그중 한 업체인 ‘밤 이사’는 실종을 원하는 고객에게 돈을 받고, 고객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지역, 새로운 집, 직장을 구해준다. 그리고 단 하룻밤 사이의 ‘밤 이사’로 고객의 흔적을 지워준다. 하지만 이렇게 실종을 택한 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서류상 정확한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위험한 건설 현장이나, 인력이 부족한 후쿠시마현에서 대지진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을 처리하는 일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친구, 가족이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기를 기다린다. 

자발적 실종을 실행한 이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그냥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를 차분하게 바라본다. 그러다 과거를 후회하고 반성한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쓰리게 후회하고 반성하고, 마음의 블랙홀을 견디고 괴로워한다. 절망의 절벽 끝에 매달린 마음은 기쁨도 슬픔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맛없는 음식을 먹는 아쉬움에도 무관심해진다. 마음에 샘솟는 감정은 전부 바닥이 끝없이 꺼지는 블랙홀로 쑥 빨려 들어간다. 글을 쓰는 지금도 자발적 실종자들의 가늠할 수 없는 블랙홀이 떠올라 두렵다.


<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2023, 한겨레출판)


 이건 올봄이 힘들었던 탓도 있다. 세상의 화사함을 내 마음이 쫓아가지 못해서. 그럼 안 쫓아가면 그만일 텐데 계절은 자꾸만 앞장서서 가버리니, 멍하니 바라만 보던 나는 서서히 커다래진 블랙홀에 발목이 걸려버린다. 이럴 때 나의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찬다. 과거의 부끄러운 행동과 잘못, 후회, 기억이 시작되는 유아 시절부터 성인 이후의 시간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내가 현재 느끼는 불안은 증발을 바랐지만 실패한 내게, 과거 매듭짓지 못한 일이 되돌아오는 것 아닐까? 이렇게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면 또 막연히 슬퍼진다. 다행히 지금은 좀 나아져서, 그만 징징대고 할 일 하라며 스스로 되뇌고 있다. 머릿속 가득 찬 생각은 블랙홀의 좋은 먹이만 될 뿐이다.

 ‘미확인 홀’이 실제로 세상에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겁이 많다. 미확인 홀을 만나도, ‘밤 이사’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도, 나는 자발적 실종의 길을 선택하지 못할 사람이다. 아마 나는 이렇게 한 번씩 위태로워지는 마음 끝을 붙잡고 블랙홀을 가까스로 피해 돌아갈 것이다. 블랙홀에 발목 정도 걸릴 때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최근 읽은 헤르만 헤세<싯다르타>에서 사람의 인생을 강물로 묘사한 부분이 있다. 사람의 삶은 모두가 강이 되어 그리움에 사무쳐서, 갈구하면서, 고통스러워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강물. 강의 소리는 그리움과 가슴을 에는 비통함으로, 잠재울 수 없는 욕구로 가득 차 울려 퍼진다. 고통에 찬 이 물결은 으슥한 곳 여울로, 거리낌 없는 폭포로, 평안한 호수와 드넓은 바다로 제각기 흘러가 목표에 도달한다. 그리고 목표 도달과 동시에 새로운 목표가 뒤따른다.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고, 하늘로부터 다시 떨어져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된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또다시 새롭게 흘러간다. 여전히 강물은 고통에 차 있고 그리움에 사무친 소리가 들리지만, 다시 귀 기울인 그 소리엔 기쁨과 고뇌, 선함과 악함, 웃음과 슬픔, 백 가지 천 가지의 소리가 끼어들어 있다. 그리고 그 백 가지, 천 가지 소리의 얽힘에도 햇빛 아래 강물은 끊임없이 반짝인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든 강물의 반짝임을 보면서, 앞으로 계속 살겠단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다. 



<참고 자료> 매년 10만 명씩 사라지는 일본인…르포 사진작가가 담은 ‘증발하는 사람들’ - 올댓아트 - 경향신문 (khan.co.kr)

도서 <인간 증발> 레나 모제 글, 스테판 르멜 사진/이주영 옮김/책세상/2017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음/박병덕 옮김/민음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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