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나비 한 마리가 테라스에 핀 꽃들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나비의 날갯짓을 보고 있노라니 아주 오래전의 일이 떠오른다.
큰아이가 네 살이었을 게다. 그때 나는 셋째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잠옷을 미처 갈아입을 새도 없이 하루를 보내던 날들이 연속이었다. 친정 식구라고는 하나 없는 도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유를 주다 말고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울리다 말겠거니 했지만, 울음보를 터트린 아이처럼 전화기는 계속 울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내려놓고 전화기를 향했다. 전화기는 울음을 멈추었고, 아이는 오래오래 울음보를 터트렸다. 나도 전화기를 붙잡고 오래 울었다.
주말 오전 근무를 마친 남편에게 젖먹이를 맡기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아직 부기가 빠졌을 리 없는 얼굴을 하고서. 주말이라 좌석이 없어 입석을 타야 했다. 네 살짜리 큰아이를 데리고 가는데도 힘들다고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만큼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창밖으로 그분과 함께했던 십 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숱한 기억이 왜 이제야 생각난 것일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분의 생 앞에서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큰아이는 작은 손으로 내 눈물을 자꾸만 닦아주었다.
겨울의 오후는 짧았다. 도착할 무렵이 되자 벌써 태양은 하루를 마치고 뒷모습을 보이었다. 병원 앞 넓은 도로에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병원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암병동은 고요했다. 들어가려 하니 어린아이를 데리고 면회가 안 된다고 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노라고 잠깐 얼굴만이라도 뵙고 나오겠다고 통사정을 했다. 한참을 난감해하더니 하는 수 없이 바로 나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해 주었다.
아이를 안고 병실을 찾아갔다. 병실마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복도 끝에 있는 병실이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분이 있는 곳이 아닌가. 한참을 서서 울음을 참고 진정을 하고 나서야 들어갔다. 아! 그곳에 그분이 누워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누워서 나를 맞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아기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왔어?”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난 부장님의 남편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월이 오래 흘러 그 병실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 나는 꺼이꺼이 오래 울었고 부장님은 수없이 내 등을 토닥였다. 부장님은 딸아이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아이는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울면서 아이의 노래를 들었다. 그 후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병문안하러 다녀간 나의 이야기를 병문안 온 이들에게 반복해서 하시며 좋아하셨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해 봄, 부장님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 번 왔으면 되었으니 다시는 힘들게 먼 길을 오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두 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부장님은 사십 대 초반이었고 나는 이십 대 초반이었다. 기자 출신인 부장님은 지적이면서도 얼굴도 꽃같이 예뻤다. 충무로에 있는 신문사, 그곳은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입사 초기에 아침이면 부장님께서 커피를 타다 주셨다. 무얼 할 줄 알지 못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기억은 부끄럽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포시 웃음꽃이 피어난다. 왜 그때는 모든 것이 그리도 서툴렀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 모든 것이 그분의 배려 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 근처 명동 쪽으로 가는 길에 ‘바오로 서원’이라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서점이 있었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웬일인지 부장님은 외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그 서점에 들러 내게 책을 사다 주곤 했다. 천주교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결혼 후 외롭고 힘들 때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성당으로 향했다.
부장님이 하늘나라로 떠난 그해 가을, 이 세상에 없는 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막내를 안고서. 서울역에서 만난 그분의 남편과 그의 동생 이렇게 넷을 태운 자동차는 빠르게 달렸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는 용인이었다. 그분은 장미꽃 바구니를 들고 오르고, 내가 준비한 국화꽃다발은 동생분이 들고, 나는 아이를 안고 그 뒤를 따랐다. 자꾸만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일도 내일로 미루지 않겠노라고. 결혼하고 나서 부장님께 받은 숱한 사랑을 아이들을 키우고 나서 시간이 나면 돌려드리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숲 속에 아담한 무덤이 나타났다. 빨간 장미꽃바구니와 국화 꽃다발이 나란히 놓이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안고서 절을 올렸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잔디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보, 당신이 그리 좋아하던 후배가 왔어.”
남편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간혹 들려오는 새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때였을 게다. 어디선가 하얀 나비가 날아왔다. 장미꽃과 국화꽃을 오가며 한참 동안 사뿐사뿐 날아다니기를 반복하더니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는 나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남편분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나는 그때 하얀 나비가 부장님이라는 생각을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 생과 사 사이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삼십 년 전에 떠났으나, 나는 아직도 그분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