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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ug 05. 2020

나다움, 그게 바로 패션의 완성

아홉 번째 기록

 어느 때보다 파란만장했던 학기가 끝이 났다. 리포트 파일을 깜빡한 채 껍데기 메일을 전송하는 실수가 연거푸 이어졌던 탓에 세 통에 걸쳐 죄송함의 그라데이션을 교수님께 몸소 보여드리곤 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교양 강의에 결석 처리가 되어 있길래 시작한 교수님과의 채팅에서 자기 관리를 허술히 했던 점을 지적받기도 했다. 모두에게 처음이었던 온라인 학기인지라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다행히 교수님들께서는 나의 실수를 눈감아 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냐면 말이다. 종강하자마자 파김치처럼 온종일 침대에 축 늘어져 있던 7월 초의 여름날에 나름 합당한 이유를 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도 난 침대에 누워 있었을 거다. 라면 과자를 세 봉지째 뜯으며 넷플릭스를 보던 무방비 상태의 나는 엄마의 잔소리 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종강한 지가 언제인데 방이 이게 뭐니. 책상에 퍼질러둔 책도 치우고. 옷걸이는 또 무슨 일이니.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샀대. 흰 티셔츠만 도대체 몇 개야? 어머, 겨울 니트가 아직도 걸려 있네! 얘가 진짜...” 이하 생략하겠다. 대서사시의 첫 장밖에 쓰지 않은 기분이 들지만 왠지 모르게 생략하고 싶어졌다. 안 그래도 방 청소를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이 정도면 푹 쉰 것 같으니 일어나 볼까.


 방 상태는 잘 정돈된 분리수거장 같았다. 학기 중 썼던 책들을 책상에서 책장으로 옮기고, PPT 자료들을 싹 다 버리고, 유사 쓰레기통으로 쓰이던 서랍을 청소했다. 예상과 달리 책상 청소는 너무나 빨리 끝이 나버렸다. 오랜만에 마음먹었는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니 옷걸이가 눈에 띄었다. 엄마 말마따나 옷걸이는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폭넓은 종류의 옷가지들을 용케 지탱하고 있었다. 옷장도 다를 건 없었다. 쌓이고 쌓인 옷더미에 서랍이 걸려 잘 열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 미안.


 옷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바닥에 털썩 앉고는 우선 겨울 옷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검은색 플리츠 스커트, 아이보리색 니트, 체크무늬 캉캉 원피스, 물결 모양 카라 블라우스, 왕리본 블라우스 등등. 대학 입학 전에 사두고는 몇 번 입지도 않고 방치해 두었던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생 언니들이 많이 쓴다더라며 엄마가 사주셨던 가죽 쇼퍼백도 정작 몇 번 쓰지 않은 채 옷장 주변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이 되면 꼭 필요하다는 말에 무작정 사두었던 것들은 많았지만, 정작 대학 생활을 할 때 즐겨 입고 즐겨 썼던 것들은 그것들에 있지 않았다. 줄곧 편안함을 추구해 왔던 나는 가죽 가방보다 에코백을 더 즐겨 썼고 블라우스보다 티셔츠를 더 즐겨 입었다. 이제는 입지 않는 옷들을 골라내 쓰레기 봉지에 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행착오가 많았던 만큼 내가 입기 좋아하는 옷, 그러니까 나다운 옷을 더 잘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이 어울린다고 말해주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다운 옷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몇 해 전부터 퍼스널 컬러가 꾸준히 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잘 맞는 색이 따로 있다는 얘기에 컴퓨터로 간단한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결과 페이지에는 내가 무슨 톤이고 어떤 색이 잘 어울리며 어떤 색은 얼굴이 칙칙하게 보일 수 있으니 피하라는 조언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직접 테스트를 받아본 것도 아니었고 교복만 입던 때라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교복과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6년 동안 줄기차게 교복만 입다가 사복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은 그야말로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원하는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다는 설렘과 자칫하면 패션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 어른이 되었다는 마음에 코트와 블라우스를 샀던 것부터 문제였지 않았을까. 온갖 어른스러운 옷은 다 사놨는데, 막상 입어 보면 엄마 옷 몰래 입은 꼬마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옷은 처음 입어 보는 거라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하며 넘겼지만,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옷들은 앞으로도 겉으로나 속으로나 나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친구들은 그런 옷을 입은 나에게 오늘 약속 있냐며 예쁘게 봐줬고, 나도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코트는 너무 길어서 매번 조심해야 했고 원피스는 몸에 딱 붙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보다 큰 후드티나 맨투맨을 즐겨 입었던 나에게 이 옷들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이뿐인가. 가죽 쇼퍼백은 자꾸만 내 어깨에서 벗어나려 하는 탓에 열 걸음 걸을 때마다 한 번씩 어깨 밑으로 내려온 끈을 위로 올려줘야 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나. 아직도 그런 옷들을 어색해하는 내 모습은 단순히 경험치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였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대학생이라고, 막 어른이 되었다고 어른 흉내를 내는 내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내가 즐겨 입었던 옷들을 다시 찾게 된 것 같다. 찢어진 청바지, 내 몸통을 감싸고도 남는 티셔츠와 후드티, 후드 집업. 가죽 가방 대신 에코백과 고등학생 때 쓰던 백팩.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대학생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수업이 일찍 끝나 집에 가는 길에는 땡땡이친 고등학생으로 나를 보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원에서는 매번 학생으로 오해를 받았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옷을 입은 내가 진짜 나니까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다시 한번 깨 주는 것 자체가 나를 그들의 기억에 남길 수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은 가끔 좀 꾸미고 다니라는 말을 했다. 아직 1학년인데 너무 편해 보인다며 말이다. 몇몇 친구들은 자신의 퍼스널 컬러를 바탕으로 어울리는 색의 옷과 화장품을 고르기도 했고, 약속이 있는 날에는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원피스에 길게 내려온 귀걸이를 한 채 또각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친구들이 그때의 나를 보듯 나도 정성껏 꾸민 모습의 친구들이 예쁘게 보였다. 그리고 한편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들었다. 대학생일 때 저런 옷 입어 보지 또 언제 입어 보냐. 편한 옷만 찾다 보면 직장 들어가서 입고 싶은 옷 마음껏 못 입을 수도 있다. 아마도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자주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꺼내 입은 어른스러운 옷들은 고맙게도 불안감을 썩 물러가게 해 주었다. 불편했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즐겨 입는 옷을 입었을 때와 달리 어른스러운 옷을 걸친 나는 진짜 나답지 않았다. 이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라는 기분에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고, 매번 거울을 보며 어색한 내 모습에 적응해야 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아, 이 옷은 내 게 아니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편안한 옷만을 입을 수는 없었다. 단정히 차려 입고 가야 하는 자리에 후드티에 뜯어진 청바지 걸치고 갈 수는 없지 않나. 결단을 내려야 했다.


 1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이 되었다. 물론 시행착오 기간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게 틀림없다. 우여곡절 많았던 1년을 거쳐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묻는다면 말이다. 지금의 나에 충실하게 입기로 했다. 지금처럼 편한 옷 마음껏 입되, 불편한 옷도 나다움을 묻혀 보기. 아무리 나다운 게 좋은 거라지만, 나답지 않다고 마냥 피해 다니는 것도 세상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즘 즐겨 입는 옷은 분홍색 셔츠 원피스인데, 지금의 나다운 옷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나에게는 불편한 원피스지만 통 넓은 셔츠라 또 편하니까 말이다. 바람 불 때면 옷이 펄럭거리는 탓에 꼼짝 못 하고 옷자락을 부여잡게도 만들지만, 바람 안 불 때는 이만큼 편한 옷이 없다. 이 옷을 입는 날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마치 나에게 딱 맞는 슈트를 입은 느낌이랄까. 다른 옷보다도 이 옷을 입으면 나다움이 100%로 치솟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줄곧 내 피부톤과 맞지 않는다며 기피했던 색이 분홍색이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잘 어울리더라. 그러니 퍼스널 컬러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는 듯하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곧 나와 잘 어울리기도 한다는 뜻이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편안한 옷의 기준 또한 바뀌겠지. 지금 불편해하는 옷들도 언젠가는 후드티와 같은 편안함을 느낄 것이고. 나다움의 가변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줏대 역할을 해주는 건 지금의 옷들이 지금의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다운 모습에 당당해지기. 나이에 맞지 않는다거나 나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누가 뭐래도 패션의 완성은 나다움이다!


공대생도 아닌데 체크 셔츠 좀 그만 입으라고 친구에게 한 소리 들었지만 그래도 나다웠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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