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랭 알러지에 코로나까지 앓아버린 첫 달
독일의 날씨는 그 악명과 달리 나에게 화창한 나날을 선사해 주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일주일 내내 하늘은 푸르렀고 공기는 맑았으며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날씨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다만 딱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추위였다.
유럽의 겨울은 한국만큼 춥지 않다는 말만을 믿고 두툼한 겉옷을 한 벌밖에 챙겨 오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의 막바지임에도 불구하고 찬 바람은 가실 줄을 몰랐고, 이를 막기에 역부족한 외투와 목도리만으로 추위와의 사투를 이어가던 나는 결국 때아닌 한랭 알러지를 앓게 되었다.
학교와 기숙사의 거리는 걸어서 30분이 걸리지만 버스를 탄다면 10분 내외가 걸린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아주 모호한 거리라고 할까. 그날도 오후 수업을 마치고 찬바람을 뚫으며 기숙사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갑자기 손등과 손목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더니 벌건 두드러기가 올라오더라. 기숙사에 도착해 몸을 녹이니 다행히 두드러기는 사라졌고, 그렇게 한 번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줄만 알았다.
독일에서의 첫 여행을 떠나던 날에는 눈비가 쏟아졌었다. 눈물이 날듯이 추웠지만 벚꽃이 물든 거리는 정말 아름다웠고, 눈 내리는 날의 꽃구경은 다시없을 추억이라는 생각에 서너 시간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하는 일행의 걱정 섞인 물음에 서둘러 거울을 보니 앞전의 두드러기가 양손뿐만 아니라 왼쪽 얼굴까지 뒤덮었지 않은가. 숙소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몸을 녹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설상가상으로 기차는 1시간가량 연착이 되었고, 나는 말 그대로 얼어 죽기 직전에야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의 일정은 나로 인해 실내 위주로 조정이 되었다. 일행들에게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낀 나는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자는 다짐과 함께 여행에서 돌아오게 되지만, 며칠 뒤 코로나에 걸리면서 사실상 병치레 끝판왕을 찍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목에서 따가움이 느껴졌다. 코로나를 의심했지만 열이 나지 않아서, 그저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목감기가 온 건가 싶어 영양제도 먹고 따듯한 차도 끓여 마셨지만 차도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인후통 탓에 나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아, 나 코로나 걸렸구나.
목은 미친 듯이 아픈데 검사는 줄줄이 음성만 나올 뿐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차라리 양성 받고 격리하면서 푹 쉬고 싶을 지경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증상이 가장 심했던 나흘째에 겨우 양성을 받아내면서 일주일 간의 격리에 들어가게 된다.
나흘째까지는 갇혀 있다는 답답함을 모를 정도로 많이 아팠다. 목이 따가운 탓에 잠에 깊이 들지 못했고, 식사 때마다 식빵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은 뒤 약을 먹으면 잠 기운이 몰려와 두세 시간 정도 새우잠을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잘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밤낮없이 짧은 잠을 많이 잔 것 같다.
목소리가 성치 않으니 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마다 두 분은 걱정이 태산이셨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기에는 내가 진 짐을 얹어 드리는 기분이 들어서 "나 진짜 괜찮아." 이 한 마디만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격리 기간 중 가장 힘이 되었던 건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한국 유학생 분들이 매일 저녁을 만들어서 내 방까지 가져다주셨고 틈틈이 간식거리도 넣어주셨는데, 매번 그 정성을 받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독일인 친구는 집에서 직접 수프를 만들어 30분 거리에 있는 기숙사까지 가져다 주었었는데, 그 순간에는 정말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타지에서 혼자 몸을 챙겨야 하는 서러움과 그럼에도 나를 챙겨주는 따스한 손길,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날을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두려움 등이 스쳐 지나가는 탓에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있는 듯 혼란스러운 밤을 보냈었다.
한국과 달리 독일은 7일간의 격리 후에 음성 판정을 받아야 격리에서 해제된다. 불행히도 7일 차에 양성이 뜨는 바람에 나는 8일째에야 바깥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햇빛은 포근하고 바람은 부드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바깥을 많이 그리워했다는 걸 느꼈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던 8일이었고, 매일 식빵을 먹어댄 탓에 아직까지도 식빵은 입에 대지조차 않는다. 외국생활의 신고식이 이렇게 강렬할 줄은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만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던 3월이었다. 내 몸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교훈이라면 교훈이겠지.
오늘 아침도 각종 영양제를 먹으면서 시작했다. 슬슬 운동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밀려드는 과제에 아마 이번 주도 운동은 뒷전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쯤 이 생활에 익숙해질는지. 언제나 그랬듯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테니 오늘도 잘 견뎌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