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e heißen Sie?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
새로운 환경에 몸을 담그게 된다면 한 번은 꼭 하게 되는, 그 이름조차 진부한 자기소개. 이름 두석 자로 시작하여 나이, 출신, 경력에 간단한 포부까지 밝혀주면 무난하게 완성이다. 살아오면서 몇십 번은 해왔을 법한데 떨림은 한결같이 가시지를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지.
외국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국적과 언어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자리, 즉 오리엔테이션에서의 자기소개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을 터. 다만 이번에는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조금은 색다른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를 인터뷰한 뒤 자신의 짝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북아메리카 출신의 학생을 짝으로 맞게 되었다. 여태껏 짝꿍이라 봤자 교복 입던 시절 짓궂거나 수더분한 남자아이들을 만날 일밖에 더 있었겠나. 그런데 생김새부터 사용하는 언어까지 다른 외국인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괜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우리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한국 문화를 전혀 모르는 짝이 내 이름을 단번에 알아듣고 발음할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영어로 내 이름을 적어 한 자씩 읽어주고 나서야 짝은 나의 이름을 비슷하게나마 부를 수 있었다. 내가 내 이름을 직접 지은 것도 아닌데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로 그는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려 노력했다. 이에 난 언제나 그랬듯 "Yes, exactly!"를 외치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고.
그다음에는 좋아하는 음식, 취미, 운동, 그리고 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사실 이야기를 나눴다기에는 뭣할 정도로 질문과 답변의 향연이었을 뿐이었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고루 먹는 편이라 좋아하는 음식을 쉽게 나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후의 질문들이었다. 여가시간에 주로 무엇을 하는지 묻자 나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평소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의식해본 적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넷플릭스라는 대항마가 있지 않나. 잠시 동안 막혔던 말문을 "Watching Netflix!" 하며 트자 가장 재밌게 본 작품이 무엇인지 묻는 짝의 기습 공격이 들어왔고, 난 다시 입을 꾹 닫은 채 내가 무엇을 봤었는지 기억해내야 했다. 결국 나는 가장 대중성 있는 작품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재밌다고 느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겨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지만 차라리 이전 질문에 머물러 있는 게 나을 뻔했다. 즐겨하는 운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공놀이라면 질색을 하고 피해 다녔던 나에게 좋아하는 운동이 있을 리 있겠나. 스포츠보다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고 얼버무리자 짝이 놀란 눈치로 나에게 되물었다. "Really? You don't like any sports?"
한국에서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은 달랐다. 교환학생 대부분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후에도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무미건조한 나의 일상에서 이야기할 요소를 찾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결국 인터뷰의 끝에서는 마음속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밋밋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조그마한 휴대전화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서너 시간, 때로는 그 이상의 시간을 쏟는 게 뭐가 좋다고 그리 살아왔을까.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바빠서 혹은 돈이 없어서 미루고 미뤄왔던 게 이제야 후회되기 시작했다. 작년에 프랑스 자수를 해보고 싶었는데 한번 시도해볼걸. 그림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한번 도전해볼걸. 한번 해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생각만 하다 잊어버렸을까.
독일에 도착한 후로 나 자신에 대해 가장 처음 알게 된 것은 '음악회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 한 가지만으로 나를 표현해야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다 보면 이를 중심으로 잔가지가 이곳저곳 뻗어나가겠지. 그러니 여기에서만은 결코 침대에 몸을 맡긴 채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지 않으리라. 내게 허락된 이곳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