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May 31. 2022

4월은 잔인한 달

이방인은 환영받지 못하는가

매년 4월이면 모종의 이유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편이다. 학기 중인 해에는 중간고사로, 휴학계를 낸 해에는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로. 재수생 때도 4월부터 심한 슬럼프가 오는 바람에 모의고사를 죽 쒔던 전적이 있다. 그만큼 4월은 도래만으로 나를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는 악랄한 존재다. 그리고 올해도 역시 다를 바는 없었고.


오리엔테이션 동안 문화충격과 향수병에 대해 그래프를 곁들인 아주 간단한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롭고 설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며 향수병을 동반한 우울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가 전부였다. 나른한 오후에 모두가 지루함을 느끼는 눈치였지만 당시 저조한 컨디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나에게만은 그 순간이 짧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충 이런 그래프였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프를 따라가 보자면, 안타깝게도 초반의 허니문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문화충격은 x축을 뚫고 음으로 곤두박질칠 만큼 뼈저리게 겪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 쉽사리 확신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올해의 4월은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나는 아시아인이고 여성이며 그리 우람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타겟이 되기 딱 좋은 대상인 거다. 독일행이 결정되자마자 제일 먼저 걱정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인종차별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인종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살림에 필요한 용품을 사기 위해 친구와 함께 가구점을 들렀던 날이었다. 수많은 독일인들로 붐비는 매장에 들어서니 괜한 긴장감과 함께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이 매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카트에 물건을 담아나갔다. 그렇게 무사히 쇼핑을 마무리하고 계산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Go back to your country!"


누군가 우리의 뒤통수에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목소리로 추정컨대 노년의 남성이었을 것이다.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다면, 당시 나에게는 감히 뒤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로 돌아 그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해도 어떻게 대응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에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나로서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시'였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우리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노인은 금세 우리 주변을 떠났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후에도 간간이 인종차별을 당했다. "니하오" 하며 인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칭챙총"거리며 조롱하는 고등학생 무리들, 서양인 고객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나를 하대하는 종업원 등. 잠깐이었지만 강렬하게 느껴졌던 나를 향한 모멸감은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고, 그 '잠깐'이 하나둘 누적되어 갈수록 나는 이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독일을 동경해서 온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자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고.


인종의 벽이 내 앞을 방해했다면 문화의 벽은 내 옆을 가로막았다. 적당히 조용한 분위기에서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내 성격과 정반대로 이곳은 허구한 날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고 밤새 춤을 춘다. 처음에야 경험 삼아 가봤지만 이내 내가 있을 곳이 아님을 깨닫고서 발을 들이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밤새도록 울려 퍼지는 파티 소리에 잠을 청하기 어려운 날도 많았다. 다 같이 어울려 노는 사람들과 달리 방 안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는 내 모습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4월에 열린 지역 축제. 역시나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이것뿐이겠나. 언어의 벽은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했다.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는 자세히 듣지 않는다면 독일어인지 영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되도 않는 영어로 수업을 듣고 조별과제를 하고 발표까지 해야 하다 보니 수업을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교수님이 하신 질문을 알아듣는다 해도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 만큼의 영어 수준이 아니니 답답할 때도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는 도대체 무엇을 배운 건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건 덤이었고.


여러모로 힘들었던 4월이었다. 부모님의 조언으로 구매한 영양제를 네다섯 알씩 쏟아부어도 축축 처지는 체력과 정신력은 도무지 살아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영 고통받으라는 법은 없었나 보다. 4월 말에 들어서자 조금씩 살아나는 기력과 함께 정신도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지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에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생활습관을 고친 덕택인 것 같다.


수업시간까지 침대에만 누워있던 전과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영양제를 먹고, 차를 마시며 하루 계획을 세우고, 공강 날에는 가족과 연락을 하는 등 나만의 생활규칙을 만들어 매일 지켜나갔다. 그러다 보니 성취감이 생겼고, 이는 곧 내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더라.


산책하던 도중 만난 말들. 말을 보는 게 이리 쉬운 일일 줄이야


하지만 완벽히 적응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인종차별을 당한 날에는 기분이 처지고, 파티 소리에 외롭고 초라한 밤을 지새우며, 수업이 많은 날에는 하루 종일 영어를 따라잡느라 진이 빠지니까. 그래도 예전처럼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들지 않는다. 독일에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남아보겠다는 다짐이 생겼기 때문일까.


여전히 외국에 있을 내년의 4월도 보나 마나 잔인하겠지만, 앞으로의 11개월이 내년의 4월에 걸린 저주를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때는 거리 가득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마냥 행복만 할 수 있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