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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un 20. 2022

자취,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우당탕탕 자취 초보 실수 모음집

평생을 부모님 그늘 밑에서 살아왔음을 깨달은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집을 떠나와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였으니까 말이다. 혼자 살게 되면 집에서는 가족들 눈치가 보여 못 했던 걸 모두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냥 부풀어 올랐었다. 과자를 잔뜩 쟁여놓고 먹는다든지, 실용성 하나 없는 인테리어 용품으로 방을 꾸민다든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막상 혼자 살림을 살아보니 그동안 꿈꿨던 자취 생활은 허상에 불과했다. 자취는 실전이었으니까.


기숙사 방을 배정받고 잠시 쉬고 있던 중에 다른 학생 분이 무언가로 가득 찬 상자를 전달해주셨다. 이전 학기 교환학생 분에게서 구매했던 살림살이들이었다. 급선무였던 청소를 끝내고 상자를 열어보니 손때가 느껴지는 살림용품이 한가득이었다. 흠집 난 프라이팬과 식기구, 스탠드 조명, 빨래 건조대, 침구 등. 상태가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은 걸러내고 온전한 것들만 솎아내니 남는 게 별로 없었다. 뭐 필요한 건 언제든 사면 되니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그렇게 내 인생 첫 자취가 시작되고 있었다.






냉장고는 위잉위잉 울지


열악한 주방시설에 혀를 내둘렀던 나는 방에 두고 쓸 냉장고를 하나 장만하기로 했다. (공용 냉장고 맨 밑에 위치한 내 칸은 어째서인지 냉장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마존에서 상품들을 대강 훑어보다가 저렴하면서 후기가 많은 상품을 골라 주문했는데, 난 아직까지도 이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녀석만큼은...


며칠 뒤 배송받은 냉장고는 생각보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다. 사진으로만 제품을 보니 사이즈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방에 두기 버거울 정도는 아니었기에 미리 생각해뒀던 위치에 냉장고를 내려놓고 플러그를 꽂았다. 그 순간 방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정적만이 맴돌던 내 방에 불청객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아니, 내 돈 주고 불렀으니 불청객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인터넷을 뒤적거리니 처음에는 소음이 심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든다기에 속는 셈 치고 울부짖는 냉장고와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지새웠다. 10분마다 반복되는 소음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는 새벽녘에 잠을 포기한 채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냉장고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골똘히 생각하면서.


환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곳은 택배 기사님이 친절히 방문 앞까지 물건을 가지러 오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내 몸뚱이보다 큰 냉장고를 이고 지고 30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까지 가야 물건을 부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깨닫고 난 깔끔히 환불을 포기했다.


환불을 못한다면 그냥 처분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마찬가지로 머나먼 분리수거장까지 직접 냉장고를 가져가야 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냉장고의 울음을 어르고 달래거나 익숙해지는 수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에 온 힘을 쏟다 결국 후자가 되어 나름대로 평온한 자취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 말씀대로 냉장고의 수평을 맞추고 내부를 음식으로 2/3 정도 채우니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손바닥만 한 냉동실에 생기는 성에는 정기적으로 전원을 끄고 녹여가며 사용하고 있고. 전원을 껐다 켤 때마다 나는 소음은 매번 새롭지만 벌써 한 학기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뭘 어쩌겠나. 나기 전부터 정해진 가족처럼 부대끼며 한 해를 나는 수밖에.


이제는 미운 정이 들어버린 나의 애물단지




살 땐 마음대로였지만 들어갈 땐 아니란다


이불을 샀다. 교환학생 분에게 구매한 이불에서 쿰쿰한 냄새가 빠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가 쓰고 있는 이불을 똑같이 구매해 쓰기 시작했다. 냄새도 안 나고 보드라운 감촉에 구매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시간이 흘러 세탁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침구류 세탁을 하라는 엄마의 말씀대로 빨래 바구니 한가득 요와 이불, 베갯잇을 담고 세탁실로 향했다. 요와 베갯잇을 세탁기에 넣고 난 뒤 이불을 마저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불이 반쯤 들어가다 전진을 멈췄다. 세탁기에 비해 이불의 부피가 너무나 컸던 탓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던 때라 나는 망연자실한 채 세탁기에서 침구를 거두어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더 큰 세탁기가 있는 세탁소를 찾아보든가, 아님 이불 커버를 사서 씌우라는 말씀에 집안일에 쉬운 일 하나 없구나 싶었다.


더위가 일찍 찾아와 요새는 담요를 덮고 자는 탓에 아직 이불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 했다. 다시 쌀쌀해지면 이불 커버를 사야지, 생각만 할 뿐이다. 집안일 한번 미루면 밑도 끝도 없다는 걸 몸소 증명 중이다.





나를 다이어트에 오르게 한 바지들의 비밀


학기 초에는 널널했던 바지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을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몸매 걱정 없이 과자를 뜯고 뜯었더라도 이 정도로 무섭게 살이 오른 적은 없기에 지레 겁을 먹은 나는 반강제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에서 가져온 반바지를 꺼내 입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했다. 똑같은 치수인 반바지는 여전히 헐렁한데 왜 저 바지들은 나를 힘겨워할까. 곰곰이 그동안의 생활을 되짚어보다 멈춰 선 건 바로 세탁이었다.


긴바지들과 반바지들의 차이점은 딱 한 가지, 기숙사 세탁기 출입 여부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세탁할 때 온도를 항상 60도로 설정해 돌렸는데 말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보았고, 엄마는 청바지를 그만치 뜨거운 온도에 돌렸으니 당연히 줄어들고도 남는다며 실소를 터뜨리셨다. 석 달을 내리 60도에 빨았는데도 용케 그 바지들을 입고 다녔다는 게 대단하다고도 하셨다.


뭐든 다 60도에 빨면 되는 줄 알았지 뭐람


이 경험으로 인해 바지가 줄지 않게 세탁하는 방법을 몸소 깨우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줄어든 바지를 원상복구하는 방법까지 알아낼 순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다 발견한 방법 하나. 의자 등받이에 바지를 씌워 지퍼를 잠가놓는 것이었다. 그게 되나 싶겠지만 이 방법으로 벌써 바지 하나를 다시 살려냈고, 지금 내 의자에는 다른 바지가 씌워져 있는 상태다.


늘어나라 바지바지


내 몸이 불어난 게 아니라 바지가 줄어들었단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다이어트는 계속될 예정이다. 헛다리 짚고 시작한 다이어트이긴 하지만, 이렇게 끝내버리면 조만간 바지가 작아지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말이다. 매끼를 챙겨 먹는 것도 자취의 어려움 중 하나였는데, 1일 2식에 한 끼는 샐러드와 과일로 때우니 요리하는 수고도 많이 덜었다. 요리하기 귀찮아서 다이어트하는 걸로 퉁치는 건 절대 아니고. 하하...





자취를 시작한 뒤 매번 엄마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을 어떻게 매일 완벽히 해내셨을까. 그동안 세상 물정 모르고 부모님 밑에서 마음 편하게 살아온 내 인생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반찬 투정 절대 안 할 거고 집안일도 전보다 더 열심히 할 거다. 언제나 말뿐인 딸이지만 말이다. 여태껏 가족들을 대신하여 궂은일을 도맡아 하셨던 엄마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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