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Apr 01. 2022

복학생, 유럽에 불시착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캐리어 두 개로 모자라 거북이 등딱지마냥 볼록 나온 배낭까지 메고 한국을 뜬 건 3월의 셋째 날.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호기로웠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열두 시간의 비행 끝에 내린 곳은 독일의 한 공항. 입국심사대를 나오자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낯선 외모의 서양인들이었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가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가운데, 내가 가진 검은 머리와 눈동자가 더 이상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하자 외마디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어떡하냐."


서울역 같았던 공항 근처 기차역


무거운 짐에 끙끙대며 겨우 도착한 학교 기숙사는 인터넷에서와 같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작 사진 몇 장과 동영상 몇 개만으로 모든 걸 담을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진작 알았어야 했다. 유럽이 대개 그렇듯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청소를 해도 먼지는 줄어들 기미조차 없었고 공용 주방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청소에 꼬박 한나절을 쏟았지만 마음에 썩 들지 않았고, 친구와 단출한 저녁을 먹으며 "한국 돌아가고 싶다"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상투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첫날밤부터 한국을 그리워하며 잠들었던 내가 지금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만 바라보다 잠드니 말이다. 기존의 가구들과 새로 들인 것들도 이제 저마다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존재만으로도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벌레들은 아마 이곳을 떠날 때까지 적응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이런 나를 보며 잘 적응하고 있다 말하겠지만, 사실 근 한 달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내가 이곳에 불시착했다는 생각이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취미 삼아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복학 후 교환학생에 선발되기 위해 토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왜 독일에 왔는지, 독일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 간단한 질문에도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독일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저 좋은 스펙이 될 거란 생각에 섣불리 독일행을 결정한 속물이 된 것 같았으니까.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할 때마다 교환학생 선발 공지가 눈에 들어오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이곳이 아닌 저곳 같았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꿈과 갑자기 생긴 기회의 무게를 견주자면, 후자가 아무리 월등하더라도 오랜 세월의 묵직함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나는 설레어야 마땅할 첫 달 내내 향수병이 아닌 후회병을 아주 지독히도 앓게 되었다.


기분이 처질 때면 왠지 모르게 글과 가까이 있고 싶어지더라. 3월 중순의 어느 날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스탠드 하나에 기댄 채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자 한국서 챙겨 온 단 한 권의 책을 펼쳤다. 그리고 한동안 첫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내 마음을 꿰뚫은 듯한 문장 때문이었다.



어떤 감정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그게 내 집이 되어 버린다.



이 몇 마디가 침잠하던 나의 마음을 단숨에 수면 위로 꺼내 올렸다. 그래, 벌써부터 우울하게 처져 있으면 될 일도 안 될 거야. 원했든 원치 않았든 독일에 온 건 누구의 강요도 아닌 오로지 나만의 선택이었으니 책임을 지자. 여기서 할 일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년의 나를 생각하며 버티자. 아니, 이왕이면 버티지 말고 즐겨보자.


한국에서도 조용한 편에 속하는 나에게 이곳의 문화는 생소하고 어색하며 부담스러운 것들 투성이다. 밤늦게까지 기숙사 곳곳에서 노래를 틀고 파티를 연다든지, 술에 잔뜩 취해 춤을 춘다든지. 특히 수업의 주를 이루는 열띤 토론은 주입식 교육의 결정체인 나를 몇 번씩이나 옥죄어 온다. 아직 영어도 독일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부딪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여주인공의 불시착으로 시작되는 그 드라마가 결국에는 해피엔딩이었듯, 이제 막 시작된 1년 반 동안의 독일 생활도 결국에는 웃으며 마무리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더 바랄 게 있다면 훗날 이때를 뒤돌아봤을 때 행복함과 아쉬움의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어줄 테니.


작가의 이전글 2년차 브런치 작가의 조촐한 소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