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단언집 20화

죽음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by 유예리


죽음이 이토록 깊게 가닿았던 적 있던가.


초등학교 6학년, 놀이터로 향하는 길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느낌이, 까르르 함께 웃던 그 소리가, 가족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던 TV 리모컨을 내어주는 다정함이, 엄마 몰래 간식을 사 먹던 추억이. 그렇게 하나씩 쌓아져 가던 내 내면의 기둥. 준비 없이 맞닥뜨린 기둥 무너짐은 내 안에 붕괴를 만들었고, 죽음은 그 폐허 아래 잠식해 있었으며, 끝없는 구조의 요청에도 나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아, 아니 절대로 외면해 웅크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무서웠는지, 폐허는 정리할 생각도 못 하고 보일 때마다 내 깊은 곳에 묻고 또 묻고. 그곳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16년이 훌쩍 지난날이다.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타인이 만들어준 기둥이 그 쓰임을 다했을 때, 그래서 마침내 내가 기둥이 되어줄 수 있을 만큼 커버린 지금.


유서

갑작스럽게 부름을 받아 여러분에게 "안녕히"라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별하는 일이 없도록 이 편지를 씁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은총은 물론, 제게 훌륭한 세 아이가 있었고 그 배우자들 또한 제게 사랑을 베풀어준 덕분입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특히 노년에 들어선 다음부터는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모로 애써주신 일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립니다. [...] 나 자신은 여러모로 부족하고 비상식적이었던 것을 이제 와 뒤늦게 후회만 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아이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알츠하이머 기록자 중, 어머니의 유서 _ 사이토 마사히코,『알츠하이머 기록자』, 조지혜, 글항아리


유서는 인지증에 항복하기 전 그녀와 무척이나 똑같았다. 살아있을 때 모습으로 주변을 위로하는 글. 그렇다면 알츠하이머에 본성을 잃어가던 그녀, 유서 속 그녀 중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 죽음 후에도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서시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 벗 강처중은 친구의 유고 시집 발문에서 죽음의 외마디를 전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_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 중


일본인 간수가 전하길,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 지르고 운명했다고. 강처중은 짐작건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듯했다며 추모했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벗이었던 그의 말을 믿어볼 수밖에. 다만, 죽음 앞에서 딱 한 음의 외마디. 그마저 그의 시와 같다. 어린 나이 제 뜻하지 않게 닥친 영면을 앞두고 그는 어떤 말을 하고자 했나?



《말하는 머리들》_ 서울시립미술관


나는 녹음된 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 픽셀 속 모습으로, 묵혀두어 관리하지 않는 SNS 계정으로. 디지털 유서를 남기며 떠날 테다. 지금은 죽어있지만, 내가 죽으면 되살아날 복제품 그것들. 나는 지금 어디에 죽고, 어디에 사는가?


25.06.27 : 알츠하이머기록자 완독
25.07.04 : 영화 동주 상영회 참석
25.07.05 : 말하는 머리들 전시 일부로 <폴즈 인터뷰> 목소리 수집


어머니의 위로에 사무친 아들이, 외마디로 운명을 받아들인 그가, 말하는 머리들이 적어준 조각 글이, 너도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안의 죽음을 구해주었다.


유서를 써야겠다.

내 원하는 죽음의 형태로 남고자, 그 욕심으로.

누군가의 기둥이 무너지지 않도록, 글로 위로할 수 있도록, 죽음 앞 내 외마디가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복제품도 함께 묻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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