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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Nov 24. 2017

11월의 오스트리아, 빈 가을을 품다

낙엽을 입은 프라터(Prater), 아침 가을 산책

비행기 안의 텁텁한 공기에서 벗어나 상쾌한 가을 공기가 내 폐 속으로 들어온다.

11월, 오스트리아(Austria) 빈(Wien)은 우리나라의 11월과 많이 비슷하다. 덕분에 인천에서부터 입고 왔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빈 국제공항(Flughafen Wien-Schwechat)을 빠져나왔다.


잠들 수 없는 가을밤

늦은 밤 도착했기에 숙소까지는 택시가 유일한 교통편이다. 불빛으로 화려한 빈의 밤거리를 천천히 느껴보고 싶었지만 텅 빈 하이웨이를 빠르게 달리는 택시 안에서는 모든 장면이 1.5배속으로 지나간다. 중국집 자장면 배달처럼 신속 정확하게 도착한 숙소, 난 짐만 팽개쳐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11월의 오스트리아, 빈의 가을밤을 이대로 넘기기는 싫었기 때문에...


숙소 근처로 밤 산책을 나선다. 늦은 시간인 만큼 인적은 드문정도가 아니라 그냥 아~예 없다. 이럴 때면 흔히 드는 생각, 마치 공원을 내가 전부 빌린 것 같다.(정말 그럴 능력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지만 너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갓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나의 여행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기에. 아쉬웠지만 이쯤에서 가을밤 산책은 마무리해야 했다.


아침노을(Sunrise)을 입은 프라터(Prater)
얼핏 보면 저녁노을 같기도 한 아침노을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무거운 이불을 걷어차고 커튼을 젖힌다. 아침노을이 지는 숙소 앞 프라터(Prater-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놀이공원)가 보인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의 명장면을 탄생시킨 곳. 저 멀리 보이는 대관람차에서 지는 노을과 함께 빈 시내를 바라보며 두 남녀 주인공은 키스를 나눴다. 눈곱도 안 뗀 이른 아침부터 내 마음에도 사랑이 샘솟는 것 같다. 근데, 혼자인 이 곳에서 난 누구와 사랑하나??? 흙흙...


가을은 산책의 계절
하늘은 파랗고 땅은 노랑 푸르스름한 갈색(?)이다

지난밤의 아쉬움도 달랠 겸, 숙소 주변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다. 밤이라 몰랐는데 프라터와 이어져 있는 산책로가 생각보다 넓고 길다. 일단 먼저 어제 돌아봤던 프라터 공원의 반대편, 나무들이 울창한 숲 같은 공원으로 향한다.


낙엽 소리를 들으려 일부러 가운데 길이 아닌 양옆으로 걸었다
공원 안의 작은 간이역, 지금은 운행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원 산책길은 온통 가을 향기로 가득하다. 위를 보면 파란 하늘 아래로는 노랑과 갈색이 적절하게 섞여있다.

바사삭! 바사삭! 이것은 과자 씹는 소리가 아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는 소리, 낙엽이 내는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자연의 모습인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역시 자연의 소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고요한 공원에 울려 퍼지는 바삭한 소리가 클래식처럼 들리면서 가을 산책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흔히 가을 하면 외롭고 쓸쓸함을 떠올리지만 지금 이 순간 공원에서 느끼는 빈의 가을은 따듯하다.



가을색 건물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외벽, 마치 가을 단풍같다. 가을과 잘 어울린다
비록 건축에 대해 잘 모르지만 디자인만 딱 봐도 그냥 평범한 건물은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마치 숲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저 멀리 숲이 아닌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잎이 거의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 사이로 건물이 하나 보인다. 붉은 단풍색인 것 같기도 하고 연한 노란색 같기도 하다.

우거진 숲(?)을 벗어나 마침내 건물 앞에 도착했다. 특이한 디자인의 건물 부지가 제법 넓다. 무슨 공장인지 회사인지... 외벽에는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다. 내가 두 가지 색을 본 게 헛걸 본건 아니었다. 짙은 주황색에서 시작돼 상아색으로 끝나는 건물의 색이 이 가을의 단풍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저 색을 하나의 색으로 표현하자면 가을색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쩌다 발견한 건물마저 이렇게 가을 가을 하다니...

그런데 대체 이 건물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궁금함에 여행자의 필수 앱인 구글 지도를 소환한다. 현재 위치를 찍자 이 곳의 정체가 드러난다. 빈 경제 경영 대학교(WU, Wirtschaftsuniversität Wien). 넓은 부지가 다 대학 캠퍼스였다. 이른 아침이라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빈은 예술의 도시인만큼 건물들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현대식의 대학교마저도 예뻤다.


여기서 잠시, 여행 후에 알게 된 사실 하나!
빈 경제 경영 대학교는 도서관이 유명했다. 물론 난 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기에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소를 바로 코앞에서 놓쳤다니 내 무지함에 열이 뻗친다.(물론 나중에 블로그를 통해 사진으로 확인했지만...) 도서관이 유명한 이유는 대학 건물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디자인 때문인데 도서관 디자인 한 건축가가 우리나라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미래를 연상시키는 UFO 같은 건물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바로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가 있다. 이 두 건물 모두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제 아름다운 그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없다. 2016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과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많은 아름다운 피조물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면서 DDP를 디자인해 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부디, 하늘에서 못다 이룬 창작활동을 계속해나가시길...



가을의 정점에서 마주친 오스트리아 사람들
가을의 정점을 찍은 원숭이 놀이터(Affenspielplatz)

잠시 바깥공기도 마셨으니 이제 다시 빈의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전보다 더 깊이 들어가 본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짙은 가을이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더 깊이깊이 들어가다 만난 공원의 한 작은 놀이터(Affenspielplatz-직역하면 원숭이 놀이터), 그곳에 가을은 지금까지 빈에 와서 본 가을 중 가장 절정이었다.

미끄럼틀 위로 높게 뻗은 나무는 아직 잎들이 제법 많이 붙어있다. 주변 나무들에 비해 키가 커 햇빛을 혼자 독식했을 것만 같은데도 아직 군데군데 초록잎들도 보인다. 미끄럼틀 아래와 그 주변으로는 낙엽들이 폭신하게 깔려있다. 마치 아이들이 놀기 좋게 일부러 쿠션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놀이터는 산책하던 중 만난 가장 가을 냄새가 나는 곳인 동시에 가장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기도 했다. 산책하는 내내 사람이 너무 없어(물론 그래서 나는 좋았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나뿐이구나라는 혼자만의 부지런부심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 하는 오스트리아 아이들과 폭풍 수다를 떠는 아이들의 엄마들이 나를 그 안에서 꺼내 주었다. 혼자만의 부지런부심은 정말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고이 접어 깊숙이 넣어 두었다.



다시 찾고 싶을 빈의 가을


프라터 공원에서부터 이어져 온 공원의 산책길이 여전히 길다. 그 길의 끝까지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젠 방향을 틀을 때가 된 것 같다. 가을이 짙게 내린 빈을 충분히 느꼈기에 이젠 또 다른 빈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 나중에 다시 빈의 가을이 그리워지면? 그때 다시 이곳으로 와 남은 산책길을 가보면 될 일이다. 다시 찾을 수 있게, 다시 찾고 싶은, 다시 찾아야만 하는 여지를 조금은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설레이는 출발! 어디로 가게 될까?

이제 어디로 방향을 틀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여행은 우연의 연속이기에 이럴 땐 불확실함에 그냥 몸을 맡기는 것도 방법일 터. 때마침 눈앞에 경전철역(Prater Hauptallee)이 들어온다. 어디로 가는 경전철인지는 모른다. 그냥 열차가 오기를 무작정 기다린다.

마침내 도착한 트램에는 어디로 가는지 표시가 되어 있지만 어차피 난 독일어를 모른다.(물론 명소들의 이름은 알기에 노선도를 보면 대충은 감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기사님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지나쳐 자리에 앉는다. 인적 없는 이 작은 역에서 트램은 나와 몇몇 손님만을 태우고 천천히 출발한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마다 나오는 안내 방송도 무시한 채 그저 창밖만 바라본다. 보다가 내려서 보고 싶은 곳이 나오면 그냥 내릴 생각이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여전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안함보다는 새롭게 마주 칠 미지의 빈에 대한 설렘이 앞선다.

몸이 살짝 떨려오기 시작한다. 쌀쌀한 가을 날씨 속에 히터를 틀어주지 않는 트램 때문이 아닌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는 내 심장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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