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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Dec 27. 2019

겨울산은 처음이라

초보 등산러의 우여곡절 한라산 당일치기

나에게 등산은 꽃피는 봄이 오면, 단풍 드는 가을이 오면 가는 계절 운동이다. 그런 나에게 겨울 등산을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토요일에 당일치기로 한라산 한번 가보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갈래? 비행기 티켓만 끊어! 렌트비랑 가서 쓰는 돈은 내가 다 쏠게~"


평소 등산을 즐기는 직장동료가 평소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 건넨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난 바로 제주행 왕복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시작부터 삐걱삐걱

오전 9시 비행기로 출발해 오후 9시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주어진 시간은 단 12시간. 이 시간 안에 산에 올라 정상에서 대충 한 끼 때우고, 다시 내려와 제대로 된 저녁 한 끼 먹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만의 미션. 한라산 당일치기하면 보통 새벽이나 아무리 늦어도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도저히 꼭두새벽에 일어날 자신이 없는) 우린 각자 집에서 아침을 먹고 여유 있게 가기로 했다. 물론 여유의 대가로 백록담은 어쩔 수 없이 포기ㅠㅜ 대신 풍경이 아름답고 오르기 쉽기로 소문난 영실코스를 타기로 했다.


제주공항에서 약 40분,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영실코스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앞서 대기 중인 차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12시가 입산통제인데 지금 여기 주차장이 꽉 차서 그때까지 안 빠질지도 몰라요. 12시 넘으면 못 올라가요. 저~기 어리목으로 가시면 거긴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엥!? 12시 입산통제?! 이래서 다들 새벽같이 출발하는 거였구나;;; 현재 시각 11시 40분, 남은 시간 20분. 네비에게 물어보니 영실에서 어리목까지는 21분이 걸린단다.


"갈 수 있을까요? 겁나 밟아야겠는데..."

"지금 차는 많이 안 막히니까 일단 빨리 가보자!"


당일치기로 한라산 가보시겠답시고 비행기 타고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못 올라가면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누가 들을까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해서라도 도저히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부아아앙~~~


잠시 내 안에 숨겨둔 질주본능을 깨워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달렸다. 물론, 도로교통법은 깍듯이 지키면서.^^

끼이이익~~~! 오전 11시 57분, 입산통제 3분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어리목 탐방안내소 세이프!


부모 이긴 자식의 최후

등산 하루 전,

옆에서 짐 싸는 날 지켜보던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주는 대로 다 넣다 보니 어느새 배낭은 뾰족한 낙타 등처럼 뽈록 튀어나왔다. 누가 보면 무슨 에베레스트라도 가는 줄 알까 싶어 난 필요한 몇 가지만 남기고 다시 비우기 시작했다.


"에이~ 그래도 이건 챙겨~"

"아니야~ 가서 사면돼~"


마지막까지 엄마가 챙겨준 것은 컵라면.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미리 챙기라는 엄마와 가서 사면 된다는 내가 격돌했다.(물론 전혀 무겁지 않았지만 내 취향의 라면이 아니었다.^^;;) 끈질긴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라면과 간식거리는 등산로 입구에서 사는 걸로 탕! 탕! 탕! 역시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나 보다.^^V


아슬아슬하게 어리목 탐방로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매점부터 찾았다. 와서 사기로 산 군것질 거리들과 컵라면을 사고, 아이젠도 하나 대여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매점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어리목은 매점 없나? 영실에는 있었는데..."

"어!? 이제 1분 남았어;;; 아무래도 그냥 가야 될 것 같은데..."


입산통제시간 때문에 더 찾아볼 새가 없어 그냥 그렇게, 먹을거리도 아이젠도 없이 겨울산행을 시작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입산은 성공!!! 하긴 했는데... 앞으로 닥쳐올 배고픔과의 사투가 걱정이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엄마 얼굴. 그리고 *BGM으로 깔리는 익숙한 노래.


*‘엄마가~♩ 보고플 때~♬’


하~ 어제 엄마 말 들을걸... 산에 들어서자마자 산은 나에게 가르침을 줬다.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 없으니, 엄마 말 잘 들으라고.

*BGM : BackGround Music의 약자로, 주로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에 사용되는 배경음악.
*그리운 어머니(Song by 작은 별 가족) :  ‘MBC 우정의 무대‘ 삽입곡으로, 이곡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최소 80년대생 이상! 아재 인증^^
어리목 탐방로 초입


우리, 헤어졌어요...

해발 1300m쯤 이르렀을 때,


"어떡하지;;; 진짜 미안한데... 나 더 이상은 못 올라갈 거 같아;;;"

"왜요? 어디 불편하세요?"

"너무 추워;;; 이러다가 저체온증 걸릴 거 같아;;;"


오리털 파카를 입고 저체온증이라니?!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통풍이 잘 안되고 땀이 잘 마르지 않는 소재의 옷을 입으면 땀으로 축축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체온이 떨어져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다고 어느 등산 블로거님께서 그러셨더랬다. 그분 말씀대로 면소재의 이너웨어와 통기성이라곤 전혀 없는 오리털 파카를 입고 온 게 화근이었다.


"사실 좀 됐는데, 웬만하면 참고 가보겠는데, 도저히 안될 거 같아;;;"

"그럼 같이 내려가요~ 다음에 다시 오면 되죠~"

"아니야~ 내가 가자고 해서 온 건데, 너라도 올라갔다가와!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동지를 버리고 혼자 올라가느냐, 아니면 함께 내려가느냐.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끙끙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내게 한 손에 두유를 쥐어주며


"뭘 고민해ㅋㅋ 일단 이거 하나 들이키고, 올라가서 사진이나 자~알 찍어와!"

"근데 내려가는 건 혼자서 하실 수 있겠어요?"

"응, 천천히 가면 돼~"


그렇다면... 난 남은 산행을 혼자 끝까지 마무리 짓기로 했다. 반드시 생생한 사진과 영상을 담아와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갑자기 텅 빈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1300고지 한라산 어리목 코스 풍경
우리의 헤어짐과 동시에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곳
겨울산행 ASMR #1 : 눈 밟은 소리, 바람소리 (feat. 헐떡거리는 내 숨소리)


현실판 겨울왕국

영화 ‘겨울왕국‘을 안 본 사람도 이제는 누구나 다아는 국민 노래.


렛 잇 고~♭ 렛 잇 고~♬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절경이 어리목 코스 해발 1500m 지점부터 시작된다. 여기 진짜 한국 맞나? 혹시 에베레스트 아니야?(오바다;;;), 좀 더 오바하면 과연 지구가 맞나?(아... 너무 갔다;;;) 싶을 만큼 나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 세상이 하나의 큰 방이라면 온통 흰색으로 인테리어를 해놓았다. 태어나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세상이다. 그 안에 있는 내가 되려 더러운 오점이 될까 싶어 본능적으로 한발 한발 조심스레 산을 올랐다. 왜 이 추운 겨울에 산에 오르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해발 1500m로 가는 길
까마귀야~ 거기서 뭐하니?
어리목 탐방로 해발 1500m
해발 1500m에서 내려다본 풍경
어렴풋이 멀리 보이는 산 아래 세상은 전혀 딴 세상 같다
잠깐 모습을 드러낸 파란 하늘
다시 정상을 향해!
겨울산행 ASMR #2 : 바람소리 (feat. 렌즈 돌아가는 소리)


*OTL (좌절금지!)

*OTL: O는 머리, T는 팔과 몸, L은 다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꿇은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다. 좌절의 상황을 가리킨다.

외로운 산행 끝에 마침내 도착한 어리목 코스의 최정상 윗세오름(해발 1700m). 그곳에 윗세오름 대피소가 있다. 대피소 안에서는 등산객들이 다들 삼삼오오 모여 간식들을 먹고 있다. 오르는 내내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처음으로 외로움이 밀려왔다. 괜히 멋쩍어 가방을 뒤적이는데 기다란 노란 막대기가 눈에 들어온다.


'맞다! 믹스커피!'


커피 챙겨 온 걸 깜빡했다.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따뜻한 마실 것이 있다는 사실에 급 기분이 좋아졌다. 얼른 보온병을 열어 뜨거운 물을 붓는데 물속에 뭔가가 있다. 엄마가 곡차를 담아주셨나 싶어 뚜껑을 완전히 열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악!!!"


물속에서 웬 덩어리들이 둥둥 헤엄치고 있다. 분명 곡물 덩어리들은 아니다. 요리조리 보온병 안과 밖, 뚜껑을 살펴보는데 작은 뚜껑에 똑같이 생긴 덩어리들이 붙어 있다. 찾았다 요놈들!!!


'아...;;;'


물을 담기 전에 씻는다고 씻었는데 물이 나오는 작은 뚜껑은 안 씻고 완전히 여는 큰 뚜껑만 씻은 것. 물을 부으려고 작은 뚜껑을 돌렸을 때 굳어있던 찌든 때들이 사각사각 갈리면서 물속으로 퐁당 입수해버린 것. 어쩐지 뻑뻑하더라니.


입산통제 시간에 걸려 급 코스 변경,  그 덕에 매점도 못 찾아 아무것도 못 사고, 동료의 낙오로 혼자 산행을 하게 되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커피마저 나가리. 이 정도면 충분히 좌절할만하지 않나? 계속되는 불운에 단단히 부여잡고 있던 멘탈에 지진이 발생했다. OTL...


만세동산 전망대라는데...
윗세오름 대피소 도착
해발 1700m, 윗세오름
윗세오름 인증^^V
어리목 코스의 최정상은 윗세오름(해발 1700m)이지만, 마지막 지점은 남벽분기점(해발 1600m)이다. 거기가 그렇게 절경이라던데...




잠시 쉬면서 멘탈을 회복하고 바로 산을 내려왔다. 하산은 영실코스로~  영실코스는 눈이 다 녹아 있어 빠르게 내려올 수 있었다. 영실 초입에서 함께 왔던 직장동료와 약 4시간 만에 재회했다.


"잘 다녀왔어? 어때? 사진은 잘 찍었나?"

"그럼요! 덕분에 저만 너무 좋은 구경 했네요.ㅎㅎㅎ 저녁 먹으면서 보여드릴게요!"


영실코스로 내려가는 길
어리목과는 달리 영실은 맑음. 같은 산인데 어찌 이렇게 날씨가 다를 수가?!
영실코스 입구 도착! 한라산 어리목-영실코스 등산 성공!

거나하게 한 끼 먹기로 한 저녁은 갈치조림으로 정했다. 대한민국 3대 도둑 중 밥도둑인 간장게장에 라이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밥을 부르는 맛이다. 분명 배부른데도 자꾸 손이 가게 만드는, 과식을 유발하는 위험한 맛! *JMT!!!

*JMT: 존맛탱(진짜 맛있다는 의미의 신조어)
색달식당 갈치조림 정식의 위엄, 푸짐한 해산물에 가스버너 두 개 정도는 써줘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


"띵똥!"


항공사에서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찾아오는 불길한 예감. 역시나... 비행기 출발 30분 지연.


"ㅋㅋㅋㅋㅋㅋㅋ."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만. 이제는 해탈했는지 웃음밖에 안 나온다. 뭐 어쩌겠는가? 그냥 기다려야지.


정말이지 시작부터 끝까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내 생애 첫 겨울등산이었다. 그래도 갖은 고초 끝에 꾸역꾸역 성공했다. 그리고 한라산 당일치기도 성공!^^V 오늘부로 겨울산 입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겨울 백록담 당일치기다!

커밍 쑨~~~!




< TRAVEL NOTE >


한라산 국립공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한라산은 높이 1,947.269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은 백록담으로 화산호가 있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흰 사슴이 물을 먹는 곳이라는 뜻에서 왔다. 물이 가득 찬 백록담의 모습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날씨에 달려있다. 때문에 흔히 하늘이 허락해야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산 220-1

[입산시간]
  - 동절기(1-2월, 11-12월) : 6AM
  - 춘추절기(3-4월, 9-10월) : 5:30AM
  - 하절기(5-6월, 7-8월): 5AM

[탐방로]
  - 어리목(6.8km/3시간) : 어리목 > 사제비동산 > 윗세오름 > 남벽분기점
  - 영실(5.8km/2시간 30분) : 영실 > 병풍바위 > 윗세오름 > 남벽분기점
  - 성판악(9.6km/4시간 30분) : 성판악 입구 > 속밭 > 사라악 > 진달래밭 > 정상
  - 관음사(8.7km/5시간) : 관음사 야영장 > 탐라계곡 > 삼각봉 > 정상
  - 어승생악(1.3km/30분) : 어승생 탐방안내소 > 어승생악
  - 돈내코(7km/3시간 30분) : 탐방안내소 > 평궤대피소 > 남벽분기점
  - 석굴암(1.5km/50분) : 충혼묘지 주차장 > 석굴암
   *상세 경로 홈페이지 참조

[시설 사용료]
  - 입장료 무료
  - 주차 이륜차 500원 / 경형 승용차 1,000원 / 승용차-4톤 미만 1,800원
  - 야영장 사용료(관음사지구 아영장, 1박 기준) 소형-3인용 이하 3,000원 / 중형-4~9인용 4,500원 / 대형-10인용 이상 6,000원

[샤워장 사용료]
  - 관음사 야영장, 1일 1회, 야영객에 한해 사용 가능
  - 운영시간 9AM - 11AM, 15PM - 18PM
  - 어른 600원 / 청소년 400원 / 어린이 300원

[전화] 064 713 9950


색달식당 중문본점
제주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갈치조림 전문점.

[가는 법]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중앙로 23

[영업시간] 매일 8:30AM - 21:30PM (주문 마감 20:20PM)
  * 브레이크 타임: 15PM - 17PM

[메뉴 및 가격]
  - 통갈치 세트 4인 : 150,000원 (통갈치조림,통갈치구이,성게미역국,돌솥밥)
  - 색달 정식 2인 : 60,000원 (옥돔구이, 갈치구이, 전복뚝배기 1개, 공기밥 2개)
  - 통갈치 구이 4인 : 100,000원 (통갈치구이, 성게미역국 & 해물뚝배기 중 선택, 공기밥 4개)
  - 통갈치구이 2인 : 60,000원 (통갈치구이, 성게미역국, 공기밥 2개)
  - 통갈치문어조림 4인 : 160,000원 (통갈치, 문어, 성게미역국,돌솥밥)
  - 통갈치문어조림 2인 : 100,000원 (통갈치, 문어, 성게미역국,돌솥밥)
  - 통갈치조림 4인 : 100,000원 (통갈치조림, 성게미역국, 공기밥 4개)
  - 통갈치조림 2인 : 60,000원 (통갈치조림, 성게미역국, 공기밥 2개)
   *대표 메뉴 외 사이드 메뉴는 홈페이지 참조

[전화] 064 738 1741


참고 : 한라산 국립공원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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