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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에서 찍어야 할 것은 기차가 아니었다

하노이 새댁 투어 - Episode Ⅴ

by 트래볼러

어렸을 적 기찻길에 얽힌 추억 하나를 소환해 볼까 한다. 사실 내 추억이라기보다는 엄마만 가지고 있는 아찔한 기억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는 아니고 주택살이를 하고 있던 시절, 밖에서 놀고 있던 내가 저녁때가 다 되어도 들어오지 않자 날 찾으러 나오셨단다. 평소 내가 자주 놀던 곳으로 찾아갔는데 그곳에 내가 없어 놀란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동네방네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말은 없었겠지만 완전 멘붕이었다고. 삼십 분을 넘게 찾아 헤매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자포자기 상태로 돌아오던 중, 집 근처에 있는 기찻길에서 애들 소리가 들리더란다. 달려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찻길 옆, 승강장 아래 빈 공간에서 내가 놀고 있었던 것. 본래 날 찾으면 한바탕 호되게 혼낼 생각이었지만 아무 일 없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라 그냥 거기서 꺼내 바로 집으로 데려왔다는 아찔한 해피엔딩이다.


그때 왜 내가 기찻길에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냥 어릴 때부터 기찻길을 좋아했던 것 아닐까 하는 추측?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른이가 되어서도 그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버릇처럼 하노이에서도 기찻길을 찾았으니까.

하노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하노이 기찻길(Hanoi Street Train)’ 마을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쭉 뻗은 기찻길을 보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일정한 모양, 일정한 간격의 나무판자들과 그 위 두 줄의 레일에서는 간이역에 온 것 같은 레트로(Retro) 감성이 느껴졌다. 어릴 땐 몰랐는데 이래서 기찻길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레일 사이에서 혹은 레일 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일은 이곳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건 분명 일이다.ㅡㅡ;;) 짝꿍이 이 포토존을 놓칠 리 없었다.


“잘 찍어줘야 해~^^(못 찍으면 알지?)”

“응... (ㅎㄷㄷ)”


찰칵!


사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시는 대로다. 대부분의 남친들은 똥손이니까.


하노이 기찻길 초입
하노이 기찻길(Hanoi Street Train)


게이지가 약간 올라온 짝꿍을 살살 달래 가며 기찻길을 따라 걸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나왔다. 빈민가에 카페가 웬 말인가 싶겠지만 관광객들을 겨냥한 전략적인 위치 선정이었다. 카페 하나로 내내 레트로 감성이었던 기찻길에서 뉴트로(Newtro) 감성이 느껴졌다.


“더운데 커피 한잔하면서 쉬었다 갈까?”

“(여전히 뾰로통) 그래.”


짝꿍의 게이지도 낮출 겸 잠시 뉴트로 감성을 즐겨보기로 했다. 쉬면서 둘러보니 재밌는 풍경들이 많았다. 오토바이 천국답게 집집마다 오토바이가 있었고, 가장 눈에 많이 들어온 건 집 앞 혹은 베란다 빨래봉에 널려있는 옷들.(속옷도 있었다. 므흣^^*) 워낙 더운 나라이다 보니 이보다 더 좋은 살균 건조기가 없지 싶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호기심에 데님 셔츠에 손을 데 보았다. 빠삭하게 잘 말라 입으면 뽀송할 것 같았다.


빠삭뽀송했던 데님 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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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널린 빨래들이 미관을 흐리기 보단 이곳의 분위기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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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철장은 좀 삭막했다. 마치 빨래들의 감옥 같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 웃고 떠들고 사진 찍는 것도 좋지만 거주하는 현지인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동네 구경은 이쯤 하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주변 관광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홍해가 갈라지듯 레일 양옆으로 이동했다. 좌우로 밀착! 한다는 이야기는 곧 기차가 지나갈 거라는 뜻. 꼴에 실제 기차가 지나가는 기찻길 한 번 가봤다고(태국 매끌렁 위험한 기찻길 시장) 으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도 옆으로 붙어 곧 다가올 기차를 기다렸다.


“오~ 온다! 온다!”

“오~ 근데 저 빨래들 다 치이는 거 아냐?!”


기차가 없을 땐 몰랐는데 기찻길 폭이 생각보다 좁았다. 누구의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집 벽으로 몸을 더 바짝 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까지 다가왔다. 걱정했던 빨래들은 자로 잰 듯 건드리지 않고 유유히 통과했다. 지금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기차가 아니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차를 찍었다. 이때는 몰랐다. 이렇게 필사적인 나를 누군가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헐... 뭐냐... 난 하나도 안 찍어주고.ㅡㅡ^”

“응? 기차 지나가니까, 기차 찍었지...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자, 봐!”


짝꿍의 카메라에는 기차를 찍는 한 남자의 치열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기차랑 같이 나오게 나도 찍어 줬어야지!!!(ㅂㄷㅂㄷ)”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림이 없구나...)아... 미안... 기차에만 너무 정신이 팔렸네."


커피로 달래 놓은 짝꿍의 게이지가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 사이 기차는 나 몰라라 줄행랑 치 듯 유유히 빠져나갔다. 기차의 뒷모습이 괜히 얄미웠다.


세상 모든 남친들, 남편들에게.

기찻길에서 찍어야 할 것은 기차가 아니다. 명심하시길, 기차는 거들뿐!


서서히 다가오는 기차, 좌우로 밀착!
기차를 꼭 찍고 싶었어...
짝꿍의 시선(미안합니다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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