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엔 왜 갔어? - Episode Ⅴ
역사책이 아닌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를 통해 처음 아우슈비츠 수용소(Miejsce Pamięci i Muzeum Auschwitz I)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영화만으로도 그때의 참혹한 현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역사를 근거로 최대한 실감 나게 묘사를 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영화이기에 어쩔 수 없이 거를 건 거른 게 이 정도 일 텐데 실제는 어떨까, 과연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볼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오락가락했다.
"갔다가 너무 끔찍해서 끝까지 못 보고 돌아왔어."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여행이었어."
"원래 가려고 했는데 여기저기서 끔찍했다는 얘기 듣고 나니까 못 가겠더라.“
블로그나 SNS의 후기도 그렇고 여행 중 만난 외국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호불호가 있었다. 크라쿠프 여행을 준비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만은 꼭 가봐야지 하는 곳이 아우슈비츠였는데, 정작 크라쿠프에 와서는 이런저런 걱정에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크라쿠프에서 머물 날이 머문 날보다 적어지자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버리고 마음 편히 크라쿠프에서의 남은 여행을 즐기던가, 아니면 용기 내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던가. 그러자 문득 ‘과연 버린다고 마음이 편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생각건대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외출할 때 집에다 중요한 뭔가를 두고 나온 것 같은 찝찝함이 여행 내내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그럴 바엔 그냥 제대로 한번 보고, 안 좋은 마음은 툴툴 털어낸 다음 깔끔하게 남은 여행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진즉에 왜 이렇게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바로 아우슈비츠 투어를 예약했다. 그리하여 이틀 뒤, 아우슈비츠에 가게 되었다.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은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가는 걸로 정해져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썰들에 현혹되어 잠시 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
폴란드의 현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옛 수도인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70km. 그곳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다.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미니버스로 약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아우슈비츠 입구에 걸려있는 아우슈비츠 슬로건이다.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나치 독일에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진 멍청이들 밖에 없었을까? 자유는 인간의 기본 권리이거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자유를 지불하다니. 더 화가 나는 사실은 이 슬로건조차도 그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용자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단다.
“글자를 자세히 봐주세요. 이상한 점이 있지 않나요?”
가이드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에 레이저를 켜고 슬로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ARBEIT'에서 알파벳 B의 모양이 이상해 보였다. 내가 아는 B는 위가 날씬하고 아래가 뚱뚱한데 슬로건 속의 B는 그와 반대였다. 하지만 어쩌면 독일어식 표기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괜히 손들고 말했다 망신 살 뻗칠까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게 정답이었다. 저 말은 거짓말이라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서 수용자들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비폭력 저항이었다고 한다. 저항이랍시고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글자 하나 뒤집어 놓는 일이었다니, 수용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나치 독일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입구를 지나 수용소 안으로 들어왔다. 수용소의 분위기는 삭막 그 자체였다. 수용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된 초소, 그 주변에 설치된 해골 그림의 지뢰밭 푯말, 그리고 2중 전기 철조망까지, 웬만한 군부대보다도 더 폐쇄적이었다. 과연 이곳을 탈출한 사람이 있었을까? 아마 육신은 이곳에 두고 영혼만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각 수용소 건물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안경, 신발, 자기 그릇 등 수용자의 물건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는데, 관람하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수시로 안타까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특히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짠 직물과 그 원료인 실제 머리카락을 모아둔 전시실에서는 너무 놀라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비명에 급하게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평소 비위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차마 보기가 힘들어 스치듯 힐끔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도망치듯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아우슈비츠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가스실이었다. 사실상 대학살이 일어난 참혹한 현장. 1945년 전후로 총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잔인한 과정이었다. 목욕을 시켜준다는 거짓 핑계로 옷을 벗겨 500명이나 되는 사람을 한 방에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치클론B라는 독가스를 투입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공간 속에서 쓰러질 수도, 발버둥 칠 수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이런 가스실이 총 4개가 있었다고 하니 한 번에 2,000명씩 희생된 셈이었다.
실제로 본 가스실은 100명은커녕 50명도 못 들어갈 만큼 좁았다. 천장에는 치클론B가 뿜어져 나왔던 구멍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또한 벽에는 고통 속에 절규와 몸부림을 쳤을 사람들의 손톱자국도 선명했다. 얼마나 세게 긁었으면 단단한 돌로 된 벽에 손톱자국이 다 남았을까? 상상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희생자들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화장되기 전 앞서 전시실에 보았던 직물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을 채취 당했고, 자원 재활용이라는 어처구니없는(사람이 자원인가?!ㅡㅡ^) 명목으로 금이빨이 뽑혔다. 화장 후 재가 되어서는 비료로 사용되거나 하천이나 연못에 버려졌다고 한다.
가스실을 끝으로 아우슈비츠 투어는 끝이 났고 이어서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Miejsce Pamięci i Muzeum Auschwitz-Birkenau)로 이동했다.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이곳은 사실상 집단 학살의 본부 격으로 약 80만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명목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 정부는 이를 마냥 좋아하지만은 않는단다. 아픈 역사를 흥미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거니와 폴란드가 어두운 이미지로 기억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크 투어리즘은 계속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는 과거가 되었지만 희생자들의 가족과 후세들의 고통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비르케나우에 도착했을 때 마침 희생자 추모비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걸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 뒤에 서서 함께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