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참을 인(忍) 자 세 번 끝에 도착한 숙소

폴란드엔 왜 갔어? - Episode Ⅱ

by 트래볼러

폴란드 여행을 준비하면서 '폴란드(가보고 싶은 나라 알수록 재미있는 나라)'라는 책을 읽었다. 업무차 2년간 폴란드 살이를 하게 된 저자가 폴란드에 살면서 체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으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입문서로 딱이었다. 폴란드 관련 서적이 별로 없을뿐더러 그나마 있는 몇몇 여행 가이드 북도 폴란드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아 가이드북 대신 이 책을 챙겨 왔다. 여행 전에도, 여행 중에도 쏠쏠하게 써먹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아닌) 거슬렸던 내용은 폴란드 사람들은 일처리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빨리빨리를 추종하는 어쩔 수 없는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다 보니 과연 여행 내내 인내심을 갖고 차분함을 잘 유지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됐다.(물론 여행에서는 최대한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나 마음처럼 쉽지 많은 않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폴란드에 도착했을 때 걱정은 현실이 됐다.


바르샤바 프레드릭 쇼팽 국제공항(Lotnisko Chopina). 수하물을 기다리는 중. 하나둘씩 사람들이 짐을 챙겨 떠날 때마다 초조함이 깊어졌다. 설마 뭐 잘못된 건 아니겠지? 폴란드 사람들은 일처리가 늦다고 했으니 그저 내 짐이 유독 늦게 나오는 것뿐 일 거라 스스로를 진정(아니 세뇌) 시키며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다렸다.(이너 피스~) 어느덧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의 반 이상이 떠나간 그때, 드디어 나의 보라색 24인치 캐리어가 나왔다. 컨베이어 벨트 속도가 내 기다림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 난 캐리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초조함이 설렘으로 바뀌었다. 이제 짐도 다 챙겼으니 공항 밖으로 나갈 일만 남았으니까. 마음은 이미 공항 밖에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복병은 뒤에 있었다. 바로 입국 수속. 아니 입국 수속이 뭐 별건가? 얼굴 한번 보고 똑같으면 여권에 도장 꽝! 찍어주면 그만인 것을. 혹 수상하면 질문 몇 개 날리고 말이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길어봐야 10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난 30분째 제자리였다. 혹시 내가 줄을 잘못 섰나 싶어 여차하면 줄을 갈아탈 생각으로 옆줄을 힐끔 쳐다봤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뭐 마약이라도 나왔나? 아님 테러범이라도 잡혔나? 우유도 김치도 없이 밤고구마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리다 삼킬 때만큼이나 답답했다. 하... 별 수 있나 참아야지. 릴랙스~


여행 와서 이렇게까지 조바심 낼 필요 있겠냐 하겠지만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우선 바르샤바(Warszawa)에 도착해 바로 크라쿠프(Kraków)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빠져나와 곧장 바르샤바 중앙역(Warszawa Centralna)으로 가면 여유 있게 크라쿠프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대략 30분 정도의 텀이 있는데 이 시간 동안 바르샤바 중앙역 구경도 하고 환전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국 수속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유가 깎여만 갔다. 역 구경이야 어차피 다시 바르샤바로 올 예정인지라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환전이 문제. 당장 크라쿠프에 가서 쓸 돈이 없었다. 물론 크라쿠프에도 곳곳에 환전소가 있었지만 알아본 바로는 바르샤바 중앙역만큼 인심이 후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크라쿠프 도착 예상시간이 자정을 넘긴 시각이라 환전소가 열려있을 리 없었다.

앞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입국 수속은 5분도 채 안 걸려 끝이 났다. 허무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고, 왜 그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런 거 저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른 바르샤바 중앙역으로 가야 했다. 캐리어 바퀴가 빠져라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목적지(구간)에 따라 티켓 가격이 다른데 급한 나머지 대충 적당히 비싼 걸로 샀다. 늦은 저녁시간이라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다. 바르샤바 중앙역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역을 향해 달렸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달리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결국 환전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건 크라쿠프에 가서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기차를 타는 게 급선무였다. 백팩에 앞 가방, 캐리어까지 (끌지 않고) 들고뛰니 초겨울 날씨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맺힌 땀이 또르르 흐를 때쯤 매표소에 도착했다.


“하-악, 하-악, 크라쿠프, 성인 한 명이요.”

“좀 전에 있던 차는 금방 떠났고, 막차 타셔야 돼요. 2시간 뒤 출발인데 타시겠어요? 막차라 가는 시간도 좀 더 오래 걸려요.”

“아... 혹시 지금 크라쿠프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막차 타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네요.”

“후... 네, 감사합니다~ 그걸로 주세요.”


젖 먹던 힘까지 열심히 뛰었지만 기차 출발 시간에 딱 맞춰 매표소에 도착한 탓에 본래 타려던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사실 뛰면서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폴란드 사람들의 늦은 일처리를 몇 시간 전 공항에서 직접 경험했기에, 혹시나 정시에라도 도착하면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야속하게도 이런 건 또 칼같이 잘 지켰다.ㅡㅡ^

한차례 승객들을 싣고 떠나서 인지 역사 안이 썰렁했다. 이제 두 시간을 뭘 하면서 때운담? 포기했던 환전이 생각났다. 대부분의 상점이 닫혀 있었지만 환전소는 아직 열려있었다. 차를 놓친 대신 환전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쨌든 고민거리 하나는 줄였으니. 더 이상 둘러볼 곳도 없어 2층 대합실로 올라왔다. 역사 안에는 나와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경비들뿐일 줄 알았는데, 다 여기 모여 있었다. 막차 동기들. 왠지 모를 위안이 됐다. 학창 시절 준비물을 안 챙겨갔다거나 숙제를 안 했을 때, 나 말고도 그런 친구가 또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위안이랄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콘센트가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숙소에 예상 도착 시간보다 많이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해둘 참이었다. 혹시나 늦게 갔다가 못 들어가거나 할 수 있을까 봐서. 전화가 안 되니 메일로 보냈는데 과연 바로 확인을 할지 안 할지는 복불복이었다. 일단 보내라도 놓자는 생각으로 메일을 보낸 지 몇 분 후, 받은 편지함을 클릭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우리 프런트는 24시간 항시 대기 중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안전하게만 와~!'

- from. 나탈리아 -


숙소에도 알렸으니 이제 막차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참을 인(忍) 자를 또 한 번 새겼다.


의자에서 쪽잠을 자며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마침내 크라쿠프행 마지막 야간열차가 도착했다. 배도 고프고, 몸도 지치고, 잠도 왔지만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는 기차를 보니,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저 기차만 타면 크라쿠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한줄기 빛을 본 것처럼 다시 힘이 솟았다. 처음 타보는 외국 기차에 설레기도 했다. 겉은 우리나라 KTX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내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봤던 호그와트행 기차가 생각났다. 영화 속 세트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갈 법한 좁은 복도에 양옆으로 객실이 있었다. 지정석은 따로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사람이 없어 대부분 텅텅 비어 있어 아무 객실이나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다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는 거리 약 300km 정도였다. 본래 고속 열차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내가 탄 막차는 이곳저곳을 들러서 가는 경로라 그런 지 4시간이나 걸렸다. 시간과의 싸움에서는 알다시피 잠이 최고다. 객실을 혼자 쓰니 가방을 베개 삼아 다리를 쭉 펴 자세를 잡고는 취침모드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갑자기 눈이 떠졌는데 바로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화들짝 놀라 정신 차리고 보니 승무원이었다. 뭐지? 혹시... 나 기차 잘 못 탄 거야? 크라쿠프로 가는 거 아닌가? 여긴 어디지? 혹시 나 불법 무임승차 처리되거나 한건 아니겠지? 벌금 물어야 되나? 어디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와 같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덮쳤다. 일단 신분 증명과 무임승차는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하기 위해 여권과 기차표를 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깊이 잠들면 위험해요. 짐을 도둑맞을 수도 있어요. 웬만하면 깊이 잠들지 마세요.”

“아... 감사합니다!!!”


승무원의 주의에 감사하게도(?)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문제는 잠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것. 와이파이도 안 터져 핸드폰도 못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 창밖도 온통 새까맸다. 결국 뜬 눈으로 멍~하니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저 존버 만이 살길이었다. 흠... 참아야지.

호그와트행? 아니고 크라쿠프행 열차 복도와 내가 자리한 객실

생애 최장시간 멍을 갱신했다. 지나고 나니 어떻게 멍 때리고 시간을 때웠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드디어!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여행 중 첫 여행지에 도착하기까지 가장 긴 여정이었다. 새벽 4시의 크라쿠프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캐리어에 우산이 있었지만 꺼내기 귀찮아 그냥 비를 맞으며 숙소로 향했다. 그만큼 모든 것이 귀찮았다. 얼른 두 다리 뻗고 누워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숙소는 파티 호스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벽에도 지하가 소란스러운 걸로 봐서는 한창 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내 인기척을 듣고 누군가 지하에서 올라왔다.


“왔구나! 난 나탈리아 야. 비를 많이 맞았네;;; 따듯한 거 좀 줄까?”

“아니, 괜찮아. 방 안내 좀 해줄래? 바로 자야겠어.”

“그래, 많이 피곤해 보인다. 아무튼 무사히 와서 다행이야.”


마음 같아서는 나도 당장 아래로 내려가 외국인들과 한데 어울려 놀고 싶었지만(만약 제시간에 왔다면 그랬을 거다.) 지금은 파티고 뭐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자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다들 파티룸에 있는지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짐은 대충 구석에 박아두고, 축축하게 젖은 옷도 안 갈아입은 채 바로 2층 침대로 올라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keyword
이전 24화스파시바 아나스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