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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환갑 엄마와 다 큰 두 아들의 추석 특선 가족여행 - Episode Ⅵ

by 트래볼러

아무리 친한 사이 일지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바로 ‘여행 가면 싸운다’는 법칙. 친한 친구, 연인, 그리고 피붙이인 가족까지. 오히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 법칙은 더 잘 들어맞는 경향이 있다. 여행 가서 절교했다는 십년지기 친구, 함께 갔다가 따로 왔다는 연인, 여행 이후 일주일 넘게 겸상을 안 했다는 가족(절대! 우리 집 이야기는 아니다. 절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여행 에피소드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여행 스타일 차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조금 복잡하게 생각해보면 대개 서로 간 이해나 배려 부족으로 생기는 오해로 인한 싸움이다.(꼭 싸우고 난 다음에야 이런 반성적인 생각들이 든다.^^;;) 평소 내가 잘 알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태도를 보일 때, 뒤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과 함께 실망이 찾아온다. 배신감과 실망은 곧 분노로 표출된다. 싸움은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평소 다정하지는 못해도 엄마와 큰 트러블 없이 지냈고, 8살이나 차이 나는 늦둥이 동생과는 서로 관심사가 달라 서로에게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남들이 봤을 때 해피 바이러스가 뿜뿜 솟아나는 화목한 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 3일 차까지 싸우지도 않아 우리 가족은 여행 가면 싸운다는 법칙도 피해 가는구나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 4일 차 방콕 여행의 마지막 밤, 오랜 시간 묵혀온 가슴속 응어리들이 조금씩 넘쳐흐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체하지 못하고 콸콸 쏟아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가족도 결국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작은 이랬다.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한 호텔 루프탑 뷔페에서

엄마 : “너무 고기만 가지고 오지 말고 야채도 좀 가져와~”

동생 : “응~ 같이 먹고 있어.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내 걱정 말고 맛있는 거 챙겨 드세요~”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 대화를 시작으로 엄마와 동생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말에 감정이 섞이기 시작하자 주제가 이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래! 이참에 다 얘기해봐!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엄마의 전쟁 선언! 동생은 이때다 싶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을 포함해 지금까지 살면서 가지고 있었던, 아니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었던 불만들이 하나씩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서로 몇 차례 공격을 주고받고 나더니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너는 뭐 할 얘기 없어? 너도 있으면 다 털어놔봐! 엄마한테든 쟤(동생)한테든.”

“응...?”


갑자기 화살이 나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현명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나도 모르게 불만들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나 역시 몇 차례 엄마와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깬 건 엄마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대화가 너무 부족한 거 같다. 엄마랑 대화 좀 하자 평소에. 만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지 말고!”


엄마의 그 말에 또 발끈하려는 동생을 난 눈빛으로 제압했다.


(찌릿!)‘야! 일단 가만히 있어!’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우리 가족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을 몰랐던 거지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었다. 대화의 부재. 그 원인은 엄마 말대로 나와 동생에게 있었다. 순간 전투 모드에서 죄인 모드로 바뀌었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어쩌면 평소 자주 하던 잔소리들이 우리와 대화를 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여행 중 평소보다 대화를 많이 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대화를 더 잘해야겠다 생각하고, 반성하고, 마음먹었다.

엄마의 마지막 한방으로 싸움은 정리됐다. 그럼 우리 가족 여행의 끝은 어떻게 됐냐고? 식사를 마치고 올라간 루프탑에서 야경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셀카를 찍었다. 이런 게 가족이다.

IMG_6058_보정.jpg 문제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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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216_보정.jpg
우리 가족의 마음을 녹여준 루프탑 야경
결국은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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