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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시바 아나스타샤

폴란드엔 왜 갔어? - Episode Ⅰ

by 트래볼러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등받이를 바로 세우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최종 점검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나에게는 여행 중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비행기도 나도 이륙 준비를 마쳤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스러운 이륙을 맞이하려는데, 자리가 불편한 건지 아니면 급똥이 마려운 건지 아까부터 몸을 배배 꼬듯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옆자리 외국인이 내심 거슬렸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라 계속 거슬리는 게 내가 불편해서 도와줘야겠다 싶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아이 콘택트를 시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문자메시지로 친구랑 연락 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제 핸드폰은 안돼요. 지금 이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을 거예요. 티켓을 잘못했는지 자리가 달라요."

"아~ 네! 그럼요!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살짝 당황했지만 뭐 문자 하나 정도야 어려운 부탁이 아니니 흔쾌히 핸드폰을 넘겼다.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한글 자판을 독수리 타법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곧 이륙하면 내 폰도 무용지물이 될 텐데 저렇게 써서야 원 이륙 전에 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이왕 도와주는 거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제가 쓸게요. 불러주세요."

"아,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난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보게 됐다. 그녀의 친구는 그녀와 같은 날 휴가를 떠나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비행기에 탑승 후 아무리 찾아도 친구가 안 보이자 그녀는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둘은 같은 비행기에 있었다. 정말인가 싶어 비행기 편과 시간을 맞춰보니 일치했다. 그녀는 친구와 서로의 좌석 번호를 주고받고는 식사 시간에 자리로 놀러 가겠다며 대화를 마쳤다. 그와 동시에 기가 막히게도 서서히 움직이던 비행기의 엔진이 점화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 문자대화_이름모자이크.jpg 그들의 대화 전문

이륙 후 안전권에 접어들어 친구를 만나고 온 그녀는 내게 고맙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괜찮다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이를 계기로 그녀와 나의 수타 타임이 시작됐다. (나에게는) 경유지인 (그녀에게는 도착지인)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장작 9시간 반 동안이나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나스타샤. 올해로 서른 살. 이제 막 계란 한 판이 된 러시아 사람이었다. 비록 핸드폰 한글 자판은 독수리 타법을 사용했지만, 몇 살이냐고 묻는 질문에 팔칠 년생이라고 답할 만큼 한국어로만 보면 그냥 파란 눈의 한국인이었다.


"한국엔 언제 왔어요?"

"일주일 전에 왔어요. 창원이랑 서울에서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고 놀았어요. 친구 결혼식 갔다가 친구 부부랑 같이 출국하는 거예요. “


아나스타샤와 그녀의 친구는(정확하게는 남사친) 남사친이 모스크바 유학 중일 당시 알게 되었단다. 남사친이 청첩장과 함께 비행기 티켓을 보내 겸사겸사 한국에 온 것이었다. 둘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한지는 모르겠지만 해외 결혼식 참석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더구나 이웃나라도 아닌 러시아에서 한국인데, 초대한 남사친이나 초대받고 온 아나스타샤나 둘 다 정말 대단하다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 말을 놓았다. 내가 오빠니까 먼저 편하게 하겠다는 꼰대스러운 멘트 없이(보통 저렇게 말하는 게 더 불편하다.), 내가 먼저 말을 놓자 자연스럽게 반말로 받아쳤다.(사실 그럴 의도로 말을 놓은 건 아니고 그냥 말이 한번 짧게 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직장인?"

"응, 회사 다녀. 마케팅 일하고 있어. “


마케팅 부서에서 아시아 시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잘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회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러시아의 취업이나 직장 문화에 대해 물었다.(곧 월급의 노예로 돌아갈 예정이라 그런지 그냥 문득 그런 게 궁금했다.) 우선 자신이 하고 있는 마케팅 쪽은 취업이 어렵단다. 반면에 공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쉽단다. 그러더니 나에게 러시아 해외취업을 제안했다. 정말 진지하게.


“음... 야근 없으면 갈게!ㅋㅋㅋ”

“에이~ 그럼 오지 마. 러시아도 야근해.”


야근은 우리나라만의 전매특허인 주 알았건만, 의외였다. 본인 역시 주 4회 정도 야근을 한단다.(물론 회사마다, 일마다 케바케일테지만) 갑자기 야근 얘기 때문인지 머리를 움켜쥐었다.


“왜? 일 얘기하니까 머리 아파?ㅋㅋㅋ”

“아... 내일 월요일이야. 너무 싫어~”


그랬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현지 기준 일요일 저녁이었다. 직장인들이 월요일보다도 더 극혐 한다는 그 시간.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계속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시커먼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회사 얘기는 괜히 꺼냈나;;; 괜히 미안했다.


승무원들이 바빠졌다.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이다. 승객들도 분주해졌다. 슬슬 랜딩 준비를 시작했다. 내일이 월요일인 건 싫지만 그래도 집에 왔다는 생각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나는 조금 아쉬웠다. 장작 9시간 넘게 입을 털어 사실 특별히 더 할 말은 없었지만 내 첫 혼행의 첫 인연인데 밥 한 끼, 커피 한 잔도 못하고 헤어진다는 게 섭섭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녀가 내 여행을 따라나설 수도, 내가 모스크바로 경로를 틀 수도 없는 일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난 가능했다. 위약금이 좀 있었겠지만 여행의 변수라 치고 목적지를 바꾸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까지 모험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았다.) 나도 랜딩 준비를 하며 아나스타샤와의 헤어짐도 함께 준비를 했다.


러시아 말로 ‘잘 가‘ 는 뭐야?”

“빠까(Пока)!”

“아~ 빠까(Пока)!ㅋㅋㅋ”

"ㅋㅋㅋ빠까(Пока)! 나중에 꼭 모스크바로 놀러와!“

“알겠어! 내리기 전에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

“좋아!”

찰칵!

“고맙다는 말은 뭐니?”

“스파시바(Спасибо)!”

“스파시바^^”

“ㅋㅋ나도 고마워^^ 즐거운 여행해.”


그날 이후, 여행 중에도 여행이 끝난 후에도 아나스타샤와는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급하게 사진을 찍느라 서로의 SNS를 팔로우한다는 걸 깜빡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아나스타샤로 검색해 찾아봤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모스크바에 아나스타샤가 많아도 너무너무너무 많았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화질 구린 핸드폰 전면 셀카 사진 한 장으로만 추억하고 있다는 웃픈 뒷이야기.ㅠㅜ

IMG_8543.JPG 아냐스타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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